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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의 영화 <올드보이>에서 우리의 오대수는 말한다. "나는 이미 괴물이 되었다." 비단 오대수뿐인가. 이것은 최근 파괴적인 욕망과 충동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리거나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한국영화 주인공들의 공통된 자기선언이다. 그러고 보면 일찍이 "괴물은 되지 말자"고 반복해 다짐하던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 주인공의 호소는 이들에겐 전혀 먹혀들지 않았던 듯하다. 과연 그렇다. 최근 한국영화의 일각에는 괴물들이(혹은 괴물이 되어가는 자들이) 성업 중이다.


가령 <올드보이>를 포함한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은 모두 복수의 괴물이 출연하는 비극이고, 김지운의 <장화, 홍련>과 <달콤한 인생>은 저도 몰래 우연히 맞닥뜨린 불가항력적인 절망의 고통에 죄의식과 분노를 토해내며 괴물이 되어가는 자들의 이야기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과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의 인물들 또한 치유되지 않은 80년대의 상처를 짊어지고 편집증적 괴물이 되어간다. 그러니 이쯤에서 물어보자. 대체 이 난데없는 괴물들의 출현은 어찌된 일인가?


일단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모두 상업적 대중영화의 상상력과 문법을 빌려 작가의식을 실현했다는 데 있다. 최근 한국영화 속의 괴물은 그렇게 작가주의가 호러와 범죄물 같은 대중적 장르영화의 과잉의 상상력을 끌어들여 빚어낸 형상이다. 더욱이 그 괴물의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것이 스크린 가득 흘러넘치는 피와 폭력, 화면구도를 과격하게 일그러뜨리는 불안과 공포, 격렬한 심리적 갈등과 분노의 분출이라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당연하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일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그런 측면에서 상업적 코드에 붙들려 있는 것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 속에 은밀히 잠재한 정치적 환기력이다.


정치적이라니.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따져보면 분노와 죄의식이 뒤범벅된 운명론적 비극의 드라마와 그것을 장식하는 과도하고 현란한 스타일을 통해 이들 영화가 은연중 헤집으며 건드리는 것은 최근 한국사회 현실의 모순 속에서 배태된 대중적 (무)의식과 공통감각의 성감대다. 저 괴물의 이야기를 통해 나름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새로운 형태의 정치-윤리학 또한 저 자신의 방식으로 그에 대처하는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는 이른바 비판적 작가주의 영화의 정치성이 이제 <박하사탕>이 대표하는 이창동식 리얼리즘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영화의 정치적 함의는 역설적이게도 너무도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당연히 탈정치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극단적이고 파국적인 상황(예컨대 근친상간이나 우주인의 침공)에서 분출하는 폭력과 뒤틀린 정념 속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너무도 극단적이기에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그 사건의 파국을 몸소 떠안고 파멸로 치달아가는 괴물들의 일그러진 정념과 무력한 몸부림을, 이들 영화는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중요한 것은 저 사건들의 치명적인 파장과 갈등은 불가항력적이고, 해결할 수도 없으며, 화해는 더더구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니 당연히 감정은 격해지고, 파국은 숙명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것이 이와 반대로 역사와 현실의 계기들을 이야기에 끌어들이면서도 그 속의 위기와 갈등을 결국은 낭만적인 화해를 통해 봉합해버리는 <웰컴 투 동막골>이나 <태풍>류의 영화언어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 것인지도 여기서 함께 기억해두자. 여하튼 그럼으로써 이들 영화가 은유적으로 드러내놓는 것은, 지금 한국사회의 근원에 숨어 가로놓여 있지만 지배질서와 지배언어 속에서는 결코 포섭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적대적인 갈등과 결여, 절망적인 심리적 위기와 교착이다.


이 근저에 있는 것이 포스트-IMF시대의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심리적 불안과 위기라는 점은 필히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이를테면 희망과 가능성이 질식된 시대의 심리적 풍경이다. 한국사회의 일상과 씨스템을 재구조화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지배와 그로 인한 양극화의 고착과 심화는 가령 독재나 IMF위기의 시기에 그러했듯 그렇게 눈에 보이는 장애를 극복하면 무언가 나아지리라는 역설적인 희망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 듯하다. 독재는 사라졌고 경제위기는 극복했음에도 무언가 나아지기는커녕 삶의 조건은 한없이 악화되어가고 나날의 삶을 옥죄는 자본의 지배와 모순은 더욱 심화되어간다는 실감이 지금의 공통감각이다. 하물며 그것이 대중들이 막연히 민주주의세력 혹은 '진보'라고 생각했던 집단에 의해 가속화되고 있음에랴. 미래는 여기서 결코 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숙명론과 체념적인 인식은 그런 가운데 나오는 것이다.


한국 작가주의 영화의 비판적 정치의식이 그렇게 극단적인 과잉의 상상력을 통해 표출되는 것은 정확히 이런 현실에 조응한다. 불가항력적이고 해결할 수도 없는 절망적 상황에 휩쓸려 괴물이 되어가는 인물이 맞닥뜨리는 치명적인 위기와 곤경은, 해결될 가망이 보이기는커녕 근원에서 악화되어가는 한국사회의 실패와 결여, 적대의 지점을 헤집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극적인 우연과 불확실함이 지배하는 폐쇄된 세계, 그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악순환, 스스로 괴물이 되어 파멸로 치달아가는 인물들의 절망적인 심리, 치명적인 죄의식과 원한 등은 그런 실패와 적대 속의 주체의 불안과 위기를 응축하고 전시하는 영화적 증상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조금 다르긴 해도 최근 한국문학에서 부각되는 탈현실적인 허구 속에 스며 있는 신경증적 불안과 폐소공포, 절망적인 파국과 죽음의 이미지, 극단적인 환상의 문법 등을 그와 방불한 맥락에서 읽고픈 유혹을 느낀다. 물론 여기에는 똑같은 시각에서 볼 수만은 없는 장르와 세대의 차이, 정치의식의 편차 등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현재 한국문학에는 현실에 대한 민감한 감각에 뒷받침된 문학의 정치적·윤리적 책임의식과는 무관하게 자아에 고착된 자폐적인 실험에 안주하는 소설이 일부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그렇다면 예컨대 편혜영의 죽음과 악취의 미학이나 박민규의 장편 《핑퐁》이 보여주는 놀랍도록 음울한 종말의 환상은 어떤가?


이 물음에는 짐작하다시피 얼마간의 긍정과 부정이 섞여 있다. 하지만 친절한 대답과 해명은 이 짧은 글에서는 불가능하니 일단은 뒤로 미루고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우리가 이들 한국영화에서 적극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이런 물음이다. 결코 일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저 끔찍한 상황을, 결국은 나 자신일지도 모를 저 괴물-타자들을 대체 어찌할 것인가?


이런 물음이 일깨우는 것은 다름아닌 이를 제대로 사유하고 감당할 수 있는 정치와 윤리의 언어가 우리에겐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다. 물론 앞서 본 한국영화의 정치-윤리학은 아직은 모호하고 또 일면 타협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 영화가 그런 불안과 위기를 봉합하거나 섣불리 화해시키지 않는 한, 그것은 바로 그 속에서 새로운 정치와 윤리의 지점을 새로운 언어로 숙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한국문학에서도 그것은 아직 잠재적인 가능성일 뿐이다. 하지만 기왕에 탈현실의 허구를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작정한 문학이라면, 그 점은 한국문학이 한켠에서 열어가야 할 또다른 방식의 새로운 정치와 윤리의 언어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함께 기억하고 탐구해야 할 지점이다.
 

김영찬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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