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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세대니 어쩌구 해도 모든 것의 마지막은 확실히 글이다.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도 기획 단계에서 글을 쓰고, 의사 전달을 해야 하며, 마지막도 글로 정리를 해야 한다. 글은 그 존재가 만들어지고 나서부터 어찌되었던 사람과 가장 가까이에서 존재하며 활용된다.

 

인터넷이 생기고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플랫폼이 다양화되면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전에는 글을 써서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 자체가 권력이었다. 신문이나 잡지, 방송 등이 권력을 갖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매체와 유통을 같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얼빈>(김훈)┃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그려내다

젊은 세대에서 김훈의 소설이 별로 인기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정적이라는 이유에서다. 극장가에서도 탄탄한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영화보다는 개연성이 떨어지더라도 크고 화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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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들의 문장 강화
글을 잘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추천하는 책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보다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집중하면 좋을 듯 싶다.

 

그런데 인터넷은 이를 무너뜨렸다. 사람들은 카페에, 블로그에, 기사 하단 댓글 창에 자신의 의견을 쏟아냈다. 더 나아가 트위터, 페이스북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새로운 사실을 알렸다. 기자, 작가 등만 하던 일이 대중화 된 셈이다.

 

이런 현상 자체는 매우 긍정적이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사이에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은 어떤 형식으로든 진화되기 때문이다. 의견이 공유되고, 사고의 교정도 가능하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백성이 글을 손쉽게 익히면 지배층이 무너진다는 우려를 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손쉽게 글을 쓰게 된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누구나글을 쓰며 의견을 공유하는 세상이 왔지만, ‘제대로글을 쓰는 사람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의 의견 공유는 자칫 진보가 아닌 퇴보로 향한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긴 글, 즉 호흡이 긴 글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 단문으로 글을 소화하는 것이 익숙해지다 보니 나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쳐 상대를 설득하거나 반박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 느끼는 대로 쏟아내고, 배설한다. 결국 글 역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기만 했지만, 그 감정을 조절하지는 못한다.

 

10대 때 논리에 대해 빈약한 교육을 받은 이들이, 이후 성인이 되어 쓰는 글 조차도 단문 위주의 가벼운 관심끌기 식이니 글쓰기 실력이 늘리 없다. 그들이 글을 잘 쓰기 위해 서점에서 구입하는 글쓰기 기술 책을 아무리 읽어도 이해되지 못하는 이유다.

 

 

글 그리고 글쓰기,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냐고? 글이 뭘까

여러 자리에서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다. 글을 쓰는 직업인지라 (물론 지금은 내 글을 자주 쓰기보다는 주로 다른 이의 글을 고치고 있다) 종종 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글 이야기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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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다시 다른 문제로 이어진다. 긴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성인 1명이 1년에 책을 10권을 채 읽지 못한다는 등의 통계적 문제가 아니다. 인터넷상에 있는 그다지 길지 않지만, 두 세 번 스크롤 해야 하는 글도 소화해 내지 못한다. (?) 기사 댓글에는 너무 길어 읽지 못하겠다거나 제목만 읽고 댓글을 다는 사람도 넘쳐난다.

 

이를 극복할 방법? 지름길이 없다. 그냥 다시 많이 읽고 쓰는 수밖에. 내 기억에는 그 때 오락꺼리가 없기 때문에 무엇인가 읽는 거 자체가 큰 오락이었고, 무엇인가 쓰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펜 하나가 아쉬워 아끼고 썼고, 공책 하나 사기가 힘들어 달력을 묶어서 쓰거나, 공책 껍데기까지 썼으니 말이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토토가등을 통해 80~90년대 음악만 즐길 것이 아니라, 그때 뭔가 읽고 쓰고 했던 것도 그 시대를 한번쯤 생각해보면 어떨까해서이다. 제대로 쓰기 위한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 아해소리 -

 

ps. 이 글은 2015년에 쓴 글이다. 그런데 지금도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더 제대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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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자리에서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다. 글을 쓰는 직업인지라 (물론 지금은 내 글을 자주 쓰기보다는 주로 다른 이의 글을 고치고 있다) 종종 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곤 한다. 질문의 형식은 다르지만, 내용은 비슷하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

 

그럼 비슷하게 되묻는다.

 

왜 글을 잘 쓰고 싶은데요?”

 

 

<하얼빈>(김훈)┃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그려내다

젊은 세대에서 김훈의 소설이 별로 인기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정적이라는 이유에서다. 극장가에서도 탄탄한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영화보다는 개연성이 떨어지더라도 크고 화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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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자기 생각을 담아 대답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잘 쓰고 싶다기보다는 형식에만 매달린다. 그냥 글 잘 쓰는 사람이 멋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를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글을 어떻게 접근하냐에 따라 그 사람의 글의 무게와 형식이 결정된다고 배워서인지, 고개를 끄덕이긴 어려운 답이다.

 

물론 글을 어떻게써야 잘 쓴다는 것은 답이 없다. 지름길도 없다. 그냥 계속 써야 한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엉덩이 붙이고 계속 쓰는 사람을 이길 글쟁이는 없다. 이는 진짜다. 과거 한동안 다른 일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한 기간이 꽤 길었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도 다른 이들의 글을 고쳐주기는 했다.

 

그런데 내 글을 쓰려 노트북을 켜는 순간, 종이를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함을 느꼈다. 쓰고 싶은 내용은 있는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내 글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그 감을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그 경험은 꽤 충격이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계속 써야 한다는 것은 진리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어떻게 접근하냐에 따라서 그 의 방향은 달라진다. 여기서는 글을 잘 쓰는 방법이 아니라, 글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글은 이고 권력이다. 글이 이 자리에서 내려온 것은 인류사 이후 한번도 없었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 하나로 사람들은 권력을 가졌고, 변화를 시도했다.

 

과거 글은 권력자의 소유물이었다. 때문에 글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소유가 가능했고, 일반 대중들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중세 서양의 경우 문맹률이 90%를 넘었다. 이 당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층은 집권층과 종교인들뿐이었다. 이들은 정보를, 사고를 자신들끼리 공유하고, 전달했다. 그 안에서 개인과 조직을 발전시켰으며, 통치 기반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실상 피지배층이 글을 배웠다고 해도 쓸모가 없었다. 배운 글로 읽을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배층끼리 공유되고 사유된 책이 피지배층에게까지 갈 통로는 없었다. 때문에 피지배층은 뭔가를 고민하고 논의할 때 오로지 구전으로만 나누고 전달했으니, 탄탄한 이론적 기반이나 통합된 지식이 있을 리 만무했다. 중세시대 종교에 의한 마녀사냥이나, 전쟁이 손쉽게 이뤄질 수 있었던 이유도, 피지배층에게는 반박할, 반대할 이론 체계나 사고가 없었고, 지배층은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성경에 기반한 신의 목소리라는 말로 정당화 했다. 글을 모르니 읽을 수 없고, 설사 읽을 수 있다 해도 공유할 수 있는 성경과 책이 없으니 피지배층은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이는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자는 그 수만 어마어마하기에 생업에 몰두하는 피지배층이 글을 배울 시간도, 사용할 수 있는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서양과 마찬가지로 읽을 책 역시 턱없이 부족했다. 양반들 사이에서도 누군가 뛰어난 책을 구해오면 필사해 읽을 정도였으니, 피지배층이 이를 소유할 수도 없고, 읽을 방법도 없었다.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활자기를 만들어낸 이후인 르네상스 시대 이후 변한다. 문맹률 역시 60%로 떨어졌고, 성경을 비롯해 책이 대량으로 인쇄돼 전파되기 시작했다. 종교계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다. 성경은 자신들만이 해석할 수 있기에 왜곡 역시 시킬 수 있었는데, 피지배층이 진실을 알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권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달 반 표류한 블로그. 글의 무게를 덜어야할 때.

글 쓰는 직업의 단점은 나의 글을 쓰기 힘들다는 점이다. 언제부터인가 글을 쓴다는 것이 무겁게 다가왔다. 그냥 일적으로 쓰는 글들은 그럭저럭 쓰겠는ㄷ...그것이 나의 글이라는 생각이 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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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도 세종이 한글을 만든 이후, 변화가 감지됐다. 한자를 무기로 한 양반들의 권력의 변화가 읽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든 서양이든 이가 급격한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글을 읽는다는 것과 이를 활용할 책 즉 전파 수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때문에 종이가 일반화되어 활자로 된 매개체(, 신문)가 일반화되기 전까지도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권력을 상징했다.

 

그런 권력의 균열이 제대로 일어난 것은 아마 인터넷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글을 쓰고, 누구나 읽을 수 있으며 온갖 정보를 공유한다. 개인이 한 조직을 넘어서는 권력을 가지기도 하고, 대중에게 막강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것이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스펙트럼을 넓히기는 했지만, 그 기반에는 글이다.

 

그러다보니 아이러니하게 누구나 글을 쓰고 읽을 수 있지만, ‘제대로글을 쓰고 읽는 이들이 적어지고 있다. 글을 읽는 이들 대신 보는이들이 늘었다.

 

글이 힘을 가질 때는 그 글이 타인의 사고에 영향을 미칠 때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과 조선 시대의 글은 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 사고는 글로 정리됐고, 그 글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책으로 전파돼 논의와 토론으로 이어졌으며, 결과물인 이론과 정책이 도출되어 피지배층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지금의 글은 아니다. 논의와 토론을 이끌어내지 못할뿐더러, 그런 글은 도리어 읽을 수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글을 보고있으며, 파편화된 짧은 글로 사고를 정립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글은 다시 권력이 되고 있다. 아이러니 하게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는 시대에 글은 다시 권력화의 중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제대로읽고 쓰는 이들은 줄어들고 있다. ‘진짜가 귀한 시대가 온 것이다. 글은 쉽지만, 쉽지만은 아닌 존재인 이유다.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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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개인적으로 글에 대한 욕심이 많은 편이다. 다른 사람의 잘 쓴 글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질투심도 갖는다. 내 스스로 아직 한참 모자름을 알면서도 주제넘게 이곳저곳 글을 쓰며 다닌다. 대학때부터 글을 쉽게 봤다. 신문 8면중에 4면 가까이를 맡으며 매주 수십장 원고지를  3년 가까이 채우다보니,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인터넷 토론카페 등에서도 다른 이들의 글을 우습게 보고, 나의 글에 대한 무게를 측정하지 못했다. 잘 쓴 글에 대해서는 일부러 머리 쥐어짜며 꼭 '딴지'를 걸어야했다. 그런데 그런 내 생각에 제동을 건 책이 바로 조정래선생의 산문집 <누구나 홀로 선 나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조정래선생은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의 저자이다. 원래 난 산문집을 잘 읽지 않는다. 그냥그런 수필의 너절한 이어짐은 그보다 더 긴박하게 산 주위 사람들의 치열한 삶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정래선생의 산문집은 내가 충격과 감동을 느낀 소설의 저자임과 동시에 누구보다도 '글'이라는 것에 무게감을 잘 느끼는 작가란 생각에 책 안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사버렸다. 결과는 한동안 난 글을 못 쓰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한국역사의 슬픔과 뿌리찾기 - 태백산맥.

책을 읽는 동기가 순수해야하다는 말이 있다. 그냥 그 안에서 지적 자양분을 맛봐야 한다는 말이란다. 솔직히 책을 읽는데 '순수'와 '불순'의 정의를 내리는 것은 웃기는 일이지만, 난 태백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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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홀로 선 나무

 

'글'은 의사소통의 주요수단이자 자신의 주장을 적절히 펼칠 수 있는 도구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흉기이기도 하고, 살릴 수도 있는 약이기도 하다. 마약과 같은 중독성을 지니기도 했고, 한 사람을 파악하는 데 유효한 기준이기도 하다. 그런 다양성을 지닌 '글'을 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내 스스로의 현학적 표현을 구사해 다른 사람에게 주입 혹은 내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 조정래선생의 산문집은 나에게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 스스로가 나를 혼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떤 음악가가 자신이 곡을 만드는 이유는 더이상 다른 사람들이 곡을 만들 필요가 없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나 역시도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더 이상 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다양성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거만하게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이런 거만한 생각이 없지 않지만, 이것이 내 삶의 과정중에 펼쳐질 일이 아닌 인생 끝자락의 목표로 바뀐 것이 조금 달라졌다. 그런데 조정래선생은 자신의 젊은 날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나는 대학시절에 나 이후에 소설이라는 문학형식을 없애버리겠다고 기염을 토했었다. 이 기고만장한 객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훈련소에서 LMG를 메고 낑낑대며 걷다고 언뜻 깨달았다. 그 깨달음 이후 나는 내가 소설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를 점검하기 위해서 나를 수십 번 분해 결합하는 고역을 치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 여부를 확인하지 못한 채로 문단에 데뷔, 오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소름이 끼친 것은 조정래선생의 현 수준에서도 이러한 겸손함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갓 어설픈 글쓰기를 시작한 나의 사고와 태도는 어떠한가?. 이 책은 비단 글쓰는 이들에게만 고하지 않는다. 조정래선생의 생각과 태도는 바로 일그러진 현대인들에게 '바른' 아니 정확히는 '차분하고 치열한 시각'의 기준을 제시한다.

 

내용 자체는 무겁지 않다. 단지 그와 유사한 행위 혹은 인생의 길을 못찾는 이들에게는 어쩌면 무거운 느낌과 하늘 한번 쳐다보고픈 새로운 마음이 생기리라 본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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