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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많은 연극을 보면서 배우의 호흡에 내 호흡을 맞춘 연극은 그다지 많지 않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첫째로는 배우들의 성향이 읽히는 경우에는 그들이 어느 시점에 호흡을 어떻게 이끌고 갈지 알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스토리나 배우들의 연기가 굳이 내 호흡까지 맞출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 더하면 공연 속에 여백이 적다보니 호흡을 같이 할 틈이 사라진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는 달랐다. 평가를 하자면 스토리나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무대 장치 모든 것이 관객들을 빨아들였다. 무대 위 배우들의 숨이 멈추면, 관객들도 같이 멈췄다. 서로를 느끼며 한 대사와 대사 사이에 무대도 관객도 적막이 흘렀고, 내뱉는 듯한 대사 뒤에는 관객석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연극의 배경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빌라 데보토 감옥의 작은 감방이다. 이 공간에는 두 남자(?)가 있다. 한 명은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구속된 감성적 동성애자 몰리나, 다른 한 명은 반정부주의자 혁명가 발렌틴이다.

내용은 많은 곳에서도 접할 수 있겠지만, 공식 자료에 나와있는 내용을 옮겨놓는다.

"몰리나는 감옥 생활의 따분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렌틴에게 영화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기는 발렌틴은 동성애자이면서 정치, 사상, 이념에는 전혀 관심없이 소극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몰리나를 경멸한다. 몰리나 역시 차갑고 이성적이며 냉혈한 같은 발렌틴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한편 몰리나는 자신의 가석방을 미끼로 감옥 소장으로부터 발렌틴에게 반정부조직에 관련된 정보를 캐내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그러나 감옥에서 하루하루 기나갈수록 몰리나의 영화 이야기에 발렌틴은 빠져들어가게 되고 둘은 서로의 차이점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조금씩 미묘한 가정에 휩싸여 가게 된다.

물리나가 곧 석방될 것이라는 소식에 발렌틴은 반정부조직 동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자신이 알게되면 혹시라도 소장에게 말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지 말아달라 청하게 된다. 서로의 진심에 자연스럽게 이끌리게 된 몰리나와 발렌틴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게 된다."

내용은 포인트를 어디에 두냐에 따라 연극은 크게 달라진다. 몰리나의 입장일 것이냐, 발렌티의 입장일 것이냐, 혹은 이념적 문제로 볼 것이냐, 동성애자의 시선으로 볼 것이냐 등등 연극 한편이 많은 것을 내포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관객이 몰리나를 보는 태도다. 애초 몰리나는 굉장히 코믹스럽게 그려진다. 자신이 봤던 영화 이야기를 발렌틴에게 들려주는 모습이나, 발렌틴에게 구박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내뱉는 몰리나는 극을 유쾌하게 이끌어 간다. 일부 남자 관객들이 몰리나의 여성스러움에 다소 역한(?) 기분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몰리나의 유쾌함은 분명 극 초반에 관객을 휘어잡는 역할을 톡톡해 해낸다.

그런데 중간에 몰리나가 감옥 소장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인물임이 드러난 후, 몰리나의 태도에 대해 관객들의 반응 역시 싸늘해진다. 실제로도 웃음의 소리가 작아진다. 나 역시도 묘한 어느 시점을 느꼈다. 몰리나의 모습이 가식으로 보였고, 그가 무대에서 보여주는 감정에 역행해 들어갔다. 흥미로운것은 관객들의 감정은 역행시켜놓은 몰리나가, 진심으로 발렌틴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관객들은 혼란에 빠진다. 몰리나의 감정에 이입하기도, 역행하기도 판단이 잘 서지 않는 상황이 벌이지는 것이다.

극의 마지막인 둘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사실 몰입도가 의외로 떨어졌다. 이 연극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어갔으면 했는데, "이미 알고 있을테니"라는 가정하에 내레이션으로 진행된 이후의 사건들은 관객들을 다소 허탈하게 만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정성화, 최재웅 두 배우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그들은 관객들의 호흡을 이끌어냈고, 관객의 감정을 뒤흔들어놨다. 올만에 꽤 썩 괜찮은 연극을 봤다.

여기에 다소 연극에 대한 팁은 얹자면, 이 연극은 마누엘 푸익의 작품으로 1976년에 스페인에서 출간되지만, 정치범과 동성연애를 다룬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를 당한다. 그러나 이후 해외에서 호평을 받으며, 헥토르 바벤코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고, 1983년에 푸익은 희곡으로 만들어 '스타의 망토 아래서'란 이름으로 출판한다. 푸익의 작품 중 1973년에 쓴 세번째 소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건'은 왕가위 감독의 '해피투게더'의 원작이 되었다고 알려졌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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