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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소수자는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 홍석천씨처럼 커밍아웃한 사람과 하리수씨처럼 트랜스젠더로 변신한 사람으로 말이다.


전에 어떤 인터넷 신문의 헤드라인처럼, 홍석천씨는 사회적 배신을 했고, 하리수씨는 사회적 변신을 한 것이다. 외모지상주의때문일 수도 있겠다. 또는 거부감의 대상과 호기심의 대상의 차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남성이 스스로의 성적 지향이 여성이 아닌 남성을 향해있다는 것은 남여 결합이 인류사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베이스에 깐 사회적 인식에서 보자면 '거부감'의 대상이지만, 여성으로 변한 남성의 모습은 일단은 '호기심 + 상품성'의 가치를 지닌다.


아마 그래서 상품성을 지닌 이들이 지금도 어두운 클럽과 유흥업에 종사하고, 거부의 대상이 사회의 눈을 피해 그곳을 찾는 현상이 극히 자연스러운 결합으로까지 보인다.


6년전 홍석천씨가 커밍아웃을 선언할 때 난 미쳤다고 생각했다. 성적소수자로서의 사회에 대한 절규가 미쳤다는 것이 아니라, 극히 자연스럽지 못한 등장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이 글을 트랙백을 보낸 글도 포함해서) 그의 선언이 사회적 파장을 낳았다고 하면서, 선구자적 위치를 그에게 선사해주었지만, 나에게 준비되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 포용하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편견을 없애자는 말은 당연하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 편부편모에 대한 편견, 외모에 대한 편견,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편견 등등 이 세상 수많은 편견들은 사라져야 하고, 하나의 인간으로 모든 것은 평가받고 어울려야 한다는 원론적이고 지극히 당연한 말을 나도 공감한다.


하지만 편견은 (그것이 비록 잘못되었더라도) 어떤 경험들이 축적된 산물이다. 충격요법으로 쉽게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껍질을 깨기 위한 홍석천씨의 고통은 이해하지만, 누적된 인식을 향해 파장만 울린다면 그 다음은 대책없이 굴러가기 때문이다.


6년전, 홍석천씨의 커밍아웃은 언론에 이슈 '꺼리'로만 적당했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어쩌면 첫 껍질을 깬 그의 행동에 그것 하나로도 충분한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것은 다양성에 대한 혼란스러운 지금, 커밍아웃을 했다면 홍석천씨 스스로에게나 받아들이는 사회나 좀더 무난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의 외침이 있었던 6년전이나 지금이나 성적소수자에 대한 인식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물론 트랜스젠더에 대해서는 조금 관대해 진 것은 사실이지만, 남성의 몸을, 여성의 몸을 지닌채 성 정체성에 혼란스러워 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아직 차갑기만 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아직은 다양하지만 그 다양함에도 분명 선이 그어져 나눠지는 사회라는 것이 새삼 다시 느낀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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