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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 연일 학교폭력에 관해 다루면서 호들갑을 떨고 있다. 사실 학교폭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수십년전에도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아마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이는 강압적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애시당초 이 나라의 교육 체계 자체가 '인성'보다는 '주입식 교육'을 강요당하면서, 예상됐던 일이다. 사람을 존중하는 것보다 국영수를 존중하는 마음을 먼저 배웠는데, 옆의 친구가 친구처럼 보이겠는가.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교육 현장은 굴러가고 있다.

사실 학교폭력은 드라마와 영화, 소설 등을 통해 수없이 많이 묘사되어 왔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그렇고,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 등등 사람들은 학교폭력의 잔인함을 수없이 느꼈다. 하지만 느끼기만 할 뿐, 그것은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말한다. 뭐 지금도 마찬가지다. 언론에서의 일은 다른 사람의 일일 뿐, 내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저런 영화를 보면서 당시의 추억을 회상한다. 고등학교대 17대 1로 싸웠다는 허풍은 둘째로 치더라도,  모두 피해자가 된 적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일까. 피해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직접적으로 당하는 자와 간접적으로 억압되는 자.

직접적으로 당하는 자는 신체적으로 폭력을 당하거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학생이다. 지금이야 일진 어쩌구 하지만, 과거에는 어쨌든 학교짱이라는 이름아래 모인 일종의 클럽 형태다. 그들의 타깃은 자신보다 약했고 만만해 보였으며 건드려도 해 될 것 없는 친구들이었다. 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학생들의 캐릭터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심각한 것은 간접적으로 억압되는 자이다. 아마 대다수라고 볼 수 있다. 건달끼 넘치는 가해자가 직접적으로 피해자를 억압할 때, 그 기에 눌려 침묵하는 자들. 싸움을 말리기보다는 '내'가 우선시되야 하기 때문에, 은연 중에 가해자와 피해자의 선을 긋고, 제3자 입장에서 바라보는 자들. 이들은 스스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기에 피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조그마한 교실에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괴롭힐 때, 그 기에 눌려 조용히 있는 상황 역시 이미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채, 자신은 제3자 혹은 가해자가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로 스스로 이미지화 시키버렸음은 깨닫지 못한다. 더욱이 이런 간접적으로 억압되는 자는 피해자임 동시에 가해자로 둔갑한다. 가해자의 횡포를 묵인해주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한번 눌려본 사람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어 느낀 사람들은, 사회에서도 똑같이 행동한다. 억압하는 자에 대한 굴종을 배우고, 직접 피해가 아닌 상황에서, 직접 피해를 입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마저 느끼게 된다.

이 이야기를 하는 나는 어떠냐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때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문제는 그 감정을 사회에까지 가져와 처세의 형태로 변환시키느냐, 타파하느냐 일 것이다.

사회에 나온 이들, 그리고 현재의 학교폭력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이 다시 사회에 나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이 될 것이고, 그 학교폭력의 기억은 유무형적으로 같은 구성원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게 가해자든, 피해자든, 혹은 심정적으로 억압된 자이든 말이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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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해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