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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자리에서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다. 글을 쓰는 직업인지라 (물론 지금은 내 글을 자주 쓰기보다는 주로 다른 이의 글을 고치고 있다) 종종 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곤 한다. 질문의 형식은 다르지만, 내용은 비슷하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

 

그럼 비슷하게 되묻는다.

 

왜 글을 잘 쓰고 싶은데요?”

 

 

<하얼빈>(김훈)┃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그려내다

젊은 세대에서 김훈의 소설이 별로 인기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정적이라는 이유에서다. 극장가에서도 탄탄한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영화보다는 개연성이 떨어지더라도 크고 화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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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자기 생각을 담아 대답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잘 쓰고 싶다기보다는 형식에만 매달린다. 그냥 글 잘 쓰는 사람이 멋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를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글을 어떻게 접근하냐에 따라 그 사람의 글의 무게와 형식이 결정된다고 배워서인지, 고개를 끄덕이긴 어려운 답이다.

 

물론 글을 어떻게써야 잘 쓴다는 것은 답이 없다. 지름길도 없다. 그냥 계속 써야 한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엉덩이 붙이고 계속 쓰는 사람을 이길 글쟁이는 없다. 이는 진짜다. 과거 한동안 다른 일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한 기간이 꽤 길었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도 다른 이들의 글을 고쳐주기는 했다.

 

그런데 내 글을 쓰려 노트북을 켜는 순간, 종이를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함을 느꼈다. 쓰고 싶은 내용은 있는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내 글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그 감을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그 경험은 꽤 충격이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계속 써야 한다는 것은 진리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어떻게 접근하냐에 따라서 그 의 방향은 달라진다. 여기서는 글을 잘 쓰는 방법이 아니라, 글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글은 이고 권력이다. 글이 이 자리에서 내려온 것은 인류사 이후 한번도 없었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 하나로 사람들은 권력을 가졌고, 변화를 시도했다.

 

과거 글은 권력자의 소유물이었다. 때문에 글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소유가 가능했고, 일반 대중들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중세 서양의 경우 문맹률이 90%를 넘었다. 이 당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층은 집권층과 종교인들뿐이었다. 이들은 정보를, 사고를 자신들끼리 공유하고, 전달했다. 그 안에서 개인과 조직을 발전시켰으며, 통치 기반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실상 피지배층이 글을 배웠다고 해도 쓸모가 없었다. 배운 글로 읽을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배층끼리 공유되고 사유된 책이 피지배층에게까지 갈 통로는 없었다. 때문에 피지배층은 뭔가를 고민하고 논의할 때 오로지 구전으로만 나누고 전달했으니, 탄탄한 이론적 기반이나 통합된 지식이 있을 리 만무했다. 중세시대 종교에 의한 마녀사냥이나, 전쟁이 손쉽게 이뤄질 수 있었던 이유도, 피지배층에게는 반박할, 반대할 이론 체계나 사고가 없었고, 지배층은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성경에 기반한 신의 목소리라는 말로 정당화 했다. 글을 모르니 읽을 수 없고, 설사 읽을 수 있다 해도 공유할 수 있는 성경과 책이 없으니 피지배층은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이는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자는 그 수만 어마어마하기에 생업에 몰두하는 피지배층이 글을 배울 시간도, 사용할 수 있는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서양과 마찬가지로 읽을 책 역시 턱없이 부족했다. 양반들 사이에서도 누군가 뛰어난 책을 구해오면 필사해 읽을 정도였으니, 피지배층이 이를 소유할 수도 없고, 읽을 방법도 없었다.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활자기를 만들어낸 이후인 르네상스 시대 이후 변한다. 문맹률 역시 60%로 떨어졌고, 성경을 비롯해 책이 대량으로 인쇄돼 전파되기 시작했다. 종교계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다. 성경은 자신들만이 해석할 수 있기에 왜곡 역시 시킬 수 있었는데, 피지배층이 진실을 알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권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달 반 표류한 블로그. 글의 무게를 덜어야할 때.

글 쓰는 직업의 단점은 나의 글을 쓰기 힘들다는 점이다. 언제부터인가 글을 쓴다는 것이 무겁게 다가왔다. 그냥 일적으로 쓰는 글들은 그럭저럭 쓰겠는ㄷ...그것이 나의 글이라는 생각이 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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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도 세종이 한글을 만든 이후, 변화가 감지됐다. 한자를 무기로 한 양반들의 권력의 변화가 읽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든 서양이든 이가 급격한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글을 읽는다는 것과 이를 활용할 책 즉 전파 수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때문에 종이가 일반화되어 활자로 된 매개체(, 신문)가 일반화되기 전까지도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권력을 상징했다.

 

그런 권력의 균열이 제대로 일어난 것은 아마 인터넷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글을 쓰고, 누구나 읽을 수 있으며 온갖 정보를 공유한다. 개인이 한 조직을 넘어서는 권력을 가지기도 하고, 대중에게 막강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것이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스펙트럼을 넓히기는 했지만, 그 기반에는 글이다.

 

그러다보니 아이러니하게 누구나 글을 쓰고 읽을 수 있지만, ‘제대로글을 쓰고 읽는 이들이 적어지고 있다. 글을 읽는 이들 대신 보는이들이 늘었다.

 

글이 힘을 가질 때는 그 글이 타인의 사고에 영향을 미칠 때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과 조선 시대의 글은 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 사고는 글로 정리됐고, 그 글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책으로 전파돼 논의와 토론으로 이어졌으며, 결과물인 이론과 정책이 도출되어 피지배층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지금의 글은 아니다. 논의와 토론을 이끌어내지 못할뿐더러, 그런 글은 도리어 읽을 수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글을 보고있으며, 파편화된 짧은 글로 사고를 정립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글은 다시 권력이 되고 있다. 아이러니 하게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는 시대에 글은 다시 권력화의 중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제대로읽고 쓰는 이들은 줄어들고 있다. ‘진짜가 귀한 시대가 온 것이다. 글은 쉽지만, 쉽지만은 아닌 존재인 이유다.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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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다소 험한 욕을 써놨다. 어느 네티즌이 기사 밑에 댓글을 포함해 서로간의 가치관 충돌로 인해 말싸움하는 것이 소모적이니 그냥 자기 하고 싶은 것에만 신경 쓰고 살자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그런데 이에 대한 신해철의 답변은 아래와 같다.

"니가 안 싸우면 내가 죽어. 안싸우는 것도 좋은데 남들한테까지 시간낭비라고 떠는 너같은 개새끼때문에 난 피투성이야. 좀 있으면 숨이 끊어지겠지. 너 내가 진흙탕 속에서 숨막혀 비명 지르는 동안 존나 우아하게 살하서 좋겠다? 씨발새끼야. 나가. 다시 오지마. 난 내 적들보다 너같이 팬이라고 착각하는 새끼들 존나 싫어. 언제가 내가 자살하거든 내 적들이 아니라 니가 죽인거라고 거나 알아둬라. 나가. 나가 씨발새끼야"

뭐 신해철의 성격상 굉장히 이해할 수 있는 욕으로 보인다. 물론 최근 들어 더 괴팍해졌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그것이 MB정권하의 쓰레기 정책들과 골통 보수들의 난립으로 그런 것일 수도 있겠고, 신해철 개인의 어떤 사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신해철의 저 댓글을 읽으며 느낀 것은 이미 이 사회가 순화된 언어로 누군가와 싸우거나 토론하기는 글러먹은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항의를 해도, 비판을 해도 씨알이 먹히는 사회가 되어버리니 이런 정서가 국민 전체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러다보니 자신의 주장을 다른 이에게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거친 언어와 자극적 언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 글을 읽기 전에 6월 26일 신해철이 근황으로 적은 글이 더 재미있다.


 

'기사화 금지'

그냥 조용히 주위 사람들과 조용히 여러 소회들을 나누고 싶다. 기사화하지 말아달라.

사실 별 내용도 없다. 기사감 될 만한 얘기는 때 되면 드리겠다. 나 좀 내 팬들하고 잠시라도 조용히 지내게 해 달라. 이렇게 구걸하다시피 부탁하는대도 짓밟고 들어오면, 한놈이 죽어나갈 때까지 싸우자는 뜻으로 이해하겠다.


신해철을 대상으로 하는 기사는 언제나 저 자극성과 폭력성 그리고 거친 언어가 동시에 존재하니 기자들에게는 좋은(?) '꺼리'가 되니, 말 한마디도 크게 만들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에 지쳤나보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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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경제 정책에 대한 허위사실을 인터넷에 유포한 혐의로 기소된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박대성 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유영현 판사는 20일 정부 경제 정책에 대해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전기통신기본법 위반)로 구속 기소된 박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유 판사는 "여러 사실을 종합해보면 박 씨가 문제가 된 글을 게시할 당시 그 내용이 허위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어 "설사 허위 사실이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상황과 외환 시장의 특수성에 비춰봤을 때 그가 공익을 해할 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앞서 박씨는 지난해 7월과 12월 포털사이트 다음의 토론방 '아고라'에 '외화예산 환전업무 8월1일부로 전면 중단', '정부 긴급 공문 발송1보-금융기관 및 기업에 정부가 달러 매수를 금지할 것을 긴급 공문으로 전송했다'는 등의 허위 글을 올린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검찰은 지난 13일 열린 박씨에 대한 결심 공판에서 "국가와 국민에 끼친 해악이 분명히 있었고 국민의 불안 심리를 노골적으로 자극한데다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징역 1년6개월을 구형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박씨의 법률 대리인인 박찬종 변호사는 "변호인 측의 주장을 받아들인 건 당연한 귀결"이라며 "검찰이 적용한 전기통신기본법은 1967년 제정된 법률로 컴퓨터가 있지도 않았던 시절이고, 규제대상도 아니었다. 이미 죽은 법을 검찰이 끄집어내 적용한 것이다. 설령 이 법이 살아있다 해도 법 47조 '공익을 해칠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행위'를 적용한 것은 죄형법정주의에도 어긋나는 주장이다. '허위 통신'을 했다고 하는 혐의엔 '허위사실'은 포함이 되지 않는다"이라고 설명했다.

박 변호사는 이어 "MB정권 정부 비판적 글에 대해 규제하는 분위기에서 무죄판결이 났다는 건 사법부가 인터넷 공간의 언론자유가 최대한 보장돼야 한다는 걸 분명히 한 판결"이라며 "최근 사법부가 시국 사건에 대해 신영철 대법관 파동 등을 거치면서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는 분위기였는데 이번 판결은 사법부 독립과 권위를 세우는 데 디딤돌이 될 만한 것이라고 본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이번 사안을 통해 박 변호사가 너무 앞서간다는 생각이 들었음과 동시에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판단'한 것에 대해 승전보를 올리는 듯한 반응 역시 당황스러울 정도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에 대한 무죄 판결은 그 자체로서 그리고 개인에게는 유의미할 수는 있지만, 그가 구속 기소된 직후 변화된 한국 인터넷내 여론 환경과 언론 환경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초를 마련했다는 수준에서 받아들여야할 사안이 사법부의 인터넷 공간에 대한 여론 자유화의 인정으로까지 확대하는 듯하다.

근본적으로 인터넷 여론 환경을 저해할 수 있는 법들과 제도부터 수정해야 한다. 사문화된 법들이 희한하게 시대에 안맞게 적용되어 네티즌들을 옥죌 수 있는 상황이 줄줄이 4년간 연출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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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까지 보고 이 글 쓴다. 2부? 볼 것도 없다. 성급하다고? 이건 조금 성급해도 될 듯 싶다.

지금 뭐하는건지 모르겠다. 분명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국민들에게 심판받는 자리 아니던가?

그런데 한쪽은 선수가 나왔는데, 다른 쪽은 선수가 보이지가 않는다. 어디 선수협 사무처장들이 나와서 말하고 있다. 국민들이 판단하기에는 너무 상대가 다르다.

현재 인터넷에서 생중계되는 야후 게시판을 보고 왔다. 대다수가 노대통령 편이다. 아니 정확히는 노대통령의 말빨과 논리에 대해 감탄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것을 누가 제공했는가.

아래에서도 썼지만, 기협에서는 혹 대통령의 입장만 대변할 수 있기에 토론 일정 연기를 부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부의 언론정책을 때릴 때 이미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되지 않을까? 만일 정말 준비가 안되었다면 그동안 국민들에게 알린 그 무수한 언론정책 비판은 준비없이, 제대로 조사없이 쓴 것인가? 어디까지 이해해야 할까.

오늘 토론회는 노대통령 임기 초기때, 검사들과의 대화처럼 기자 수십명 모아놓고 대화했어야 했다. 각 언론사 편집국장과 정경사 부장들 그리고 대선후보들까지 모아놓고 한판 떠보자..그게 노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나 기자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나 양쪽 다 속 시원한 것이 아닐까...ㅋ...물론 안할꺼다.

자기들도 안다. 그랬다가는 노대통령 주가 확 올려줘버린다. 대선 6개월 남겨두고 정계 주도권과 언론 대치 주도권을 노대통령에게 줘버린다. 노대통령과 공개 토론하는 것보다는 토론 안하는 것이 그나마 낫다. 자신들이 얻는 것도 없지만, 적어도 잃어버리는 것도 없다. 지금처럼 계속 이명박이나 박근혜 등 한나라당 대선주자들은 어디 강연장에서 비난하고, 보수 언론들은 지면을 통해 노대통령의 언론정책이 잘못됐다고 때리면 된다. 괜히 공개토론해서 약점 잡힐 이유 없고, 앞서 말했듯이 노대통령 주가 올려줄 필요 없다.

하지만....안타까운 것은 조중동이 아닌 한겨레, 경향 등의 언론들이다. 나름대로 중심을 잡아야 하는 언론들이 어느 새인가 '사회'와 '국민'보다는 '기자'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이다.

2부가 진행중이다...그런데 답답한 것은 왜일까..저 자리에 있는 분들이 나름 이 나라 언론의 한 자리씩을 맡고 있는 사람들일텐데...저들의 말이 왜 더 답답하게 느껴질까.

이런 식의 말이 싫지만....오늘 토론 역시 노대통령의 승리다. 단지, 상대 선수가 없는 승리 말이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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