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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진실'을 은폐하려는 사람들은 '진실'을 아는 순간 더 혼란에 빠질 수 있기에 '거짓'을 말해야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대부분 불순하다. 무엇인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에게 '진실을 아는 고통'에서 해방시켜주겠다고 으름짱을 놓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때도 있다. 특히 종교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연극 '순교자'는 이같은 말에 부응하면서도 진실에 대한 '은폐'가 아닌 또다른 '진실'에 대한 접근을 말하고 있다. '순교'라는 종교적 가치에 대해 '진실'과 '거짓'을 충돌한다. 진실을 아는 순간 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잇따를테고, 거짓이 그대로 유통되면 몇몇 사람들만 고통스러워 하면 된다.

세종문화회관과 서울시극단이 세종문화회관 개관 30주년과 한국 신연극 100주년을 기념해 무대에 올린 연극 '순교자'는 최근 급격히 가벼워진 연극계에서 보기 드문 무거운 연극이다. 그리고 그 무거움 안에서 연극은 '진실'과 '거짓'에 대해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혼란스럽게 한다.

배경은 6.25전후 쇠락한 평양의 중앙교회다. 육군본부 정보국장 장 대령은 육군특무부대로 평양에 파견된 이 대위에게 한국전쟁 당시 평양에서 공산당에서 감금된 14명의 목사를 조사하라고 말한다. 이중 12명은 처형당했고 2명은 살아남았다. 연극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삶과 죽음에 대해 진실을 밝혀내려고 한다. 진실이 따로 있음을 직감한 이 대위는 다양한 방법으로 살아남은 신목사에게 진실을 요구하지만 신목사는 '진실'에 대해 고민한다. 또 '순교자'가 되어야 할 '죽은 자'들에 대해 장 대령 역시 '진실'을 말하기 꺼려한다. 그러나 당시 이들을 처형한 공산당 정 소좌는 목사들의 죽음에 대해 밝히면서 그들이 신앙을 부정했다고 말한다. 도리어 살아남은 신 목사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시 신목사에 의해 부정된다.

연극 '순교자'는 1969년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김은국의 동명소설을 무대로 옮긴 것으로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해 적나라하게 이야기한다. 극은 이 대위가 상황에 대해 독백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극의 무게감과는 별개로 관객들의 집중도는 후반으로 갈수록 떨어지는 편이다. '목사들의 죽음'에 대한 극적 반전도 다소 떨어지는 상황이다. 정 소좌의 발언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기는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한 상태로 끌고간 상황에서의 반전이기에 후반부 '추모 기도' 장면이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중간중간 제대로 대사가 전달이 안되는 것도 아쉽다.

그러나 최근에 보기 드문 생각하는 연극임에는 틀림없다. 연극이 무대 위 배우를 통해 세상사와 인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예술이라면 연극 '순교자'는 이에 충분히 부응했다고 여겨진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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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하다기보다는 친하고픈 선배가 있었다.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당시 내 눈에는 돈도 안되고 욕만 먹는 일에 열정적으로 뛰어드는 그 모습이 굉장히 보기 좋았다. 미력하나마 내가 가진 능력으로 그를 도와주고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런 그 선배가 자신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팽'당했고, 억울한 일도 당했다고 말했다. 실제 그 선배의 일은 사회적으로도 적지않은 파장을 가져다 준 일도 있었기에 잘만 이용하면 출세는 아니더라도 '이름'은 조금씩이라도 알릴 수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 선배가 말한 그 부도덕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기에 그 선배를 믿었다.


사실 그 '팽'시킨 사람들의 도덕성도 사회적으로 무시하지 못할 위치였다. 다들 나름대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덕성과 더불어 남들은 해내지 못할 일들을 해낸 사람들이었다. 또 그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였기에 난 내 스스로가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선배가 자신을 '팽'시켰다는 사람들중 한분을 만났다. 1시간여의 대화후 난 혼란스러웠다. 내가 여지껏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을 때 스스로 모든 '진실'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자신도 모르게 보내게된다는 말을 그제서야 실감했다.


1시간여후 그 분과 식사를 한뒤에 헤어지면서 난 멍해지기 시작했다. 화가 나기까지 했다. 진실을 나에게 말했다면 난 충분히 그 선배의 열정을 믿기에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해 충분히 만회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배는 그러한 기회조차 만드려하지 않았다.


최근 난 대한민국 현대사의 진실에 관한 책을 읽고있다. 거기에는 여지껏 내가 존경한다고 생각했던 인사들의 치부가 조금씩 나온다. 물론 그것으로 인해 그분들이 여지껏 행했던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면면이 앞서 '진실'찾기에 혼란스러워하던 나에게는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 책마저도 내가 과연 믿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에 한 선배는 "진실을 반드시 찾을 필요가 있을까. 진실을 모르고 있을 때 편안할 수 있다면, 몰라도 되는 거잖아"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난 지금 내가 빠진 함정을 모르겠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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