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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악마의 검은 상복 응원이 도마에 오르고, 이에 붉은 악마 집행부측이 사과문을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사과문이 아니라 해명문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더군요.


붉은 악마에 대한 논쟁은 대기업의 후원을 받고, 또 앙골라전 표 분배에서의 문제점 등으로 인해 뜨겁게 시작됐습니다. 논점은, 거의 모든 내용이 붉은 악마는 이미 2002년도의 순수성을 가진 단체가 아닌, 상업성을 지녔고, 사업을 위한 단체로 변질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반대하는 입장에 계신 분들의 주장중에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눈에 띄어 공개적 반박을 해보려 합니다.


"대한민국이 5대 0으로 지거나 프로리그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할 때는 관심없던 사람들이, 꾸준히 응원하고 한국 축구발전을 위해 열심히 뛴 붉은 악마를 욕할 자격이 있나"


이 주장에서 전 붉은 악마의 특권의식을 읽었습니다. 지금 자신들이 지원받는 모든 물질적 혜택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주장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껏 축구를 지지하고 응원했던 우리이기에 지금의 혜택은 정당하다"라고밖에 해석이 안되는것이지요. 


이는 또한 평소 붉은 악마들이 주장한 "모든 국민이 붉은 악마다"라는 사고방식이 극히 상업적 멘트였음을 또한 보여줍니다. 비판 받을 것은 비판 받아야 하고, 당당히 반박할 것은 반박해야지 '자격' 운운하는 것은 스스로의 특권화의 틀을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이번 앙골라전 침묵시위 사과문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사전에 많은 붉은악마 회원은 물론 일반 관중과 공감대가 형성되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붉은 악마 회원과 일반 관중을 나누는 표현. 그렇습니다. 이미 2002년이후에 붉은 악마가 조직화 상업화되면서 '붉은 악마 모임'에서 밝혔듯이 회원과 일반 관중은 나눠지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1년 365일 모두 축구만 생각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꾸준히 축구에 대한 관심을 표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 비판할 자격이 그어진다면, 붉은 악마의 문제를 지적할 사람은 '붉은 악마 회원'이나 꾸준히 돈대주는 기업밖에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또 국민들 중에는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배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국가간 대항전에는 다시 축구를 응원하고 우리 나라를 응원합니다. 이들에게 "축구 프로리그가 살아야 국가대표팀도 산다"며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려면 평소 프로리그도 응원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일부 사람들은 100여일도 안 남은 지금 붉은 악마든 붉은 닭이든, 아니면 기업의 이익때문에 자칫 응원이 분열될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분열되면 어떻습니까. 혼자서 응원하면 어떻고, 마음 맞은 친구 서너명이서 TV보며 응원하면 어떻습니까? 광장에 나가서 어울려 응원할 사람은 하고, 차안에서 라디오 들으며 응원할 사람들은 또 그렇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응원하는 순간 마음속은 그대로 뭉쳐있을테니까요.


어쩌면 붉은 악마에 대한 논쟁은 그만큼 2002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헛된 기대와 허상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닐는지 생각해봅니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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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인, 연정훈에게 잠자리 선물"


꽤 유명한 낚시질 제목이다. 정말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어릴 적에 선물했다는 내용인데, 당시는 한가인과 연정훈이 결혼할 즈음이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밤에 둘이 누워 뭔가를 했던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엄청난 클릭수와 동시에 비난의 댓글이 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낚시' 원래 물고기를 낚는 행위다. 그런데 인터넷상에서 이 낚시질이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고 유통되고 있다. 엉뚱한 제목으로 혹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네티즌들의 클릭을 유도하는 행위를 말하고 있다.


처음에는 네티즌들의 눈길을 끌려고 하는 일부 황색저널리즘 성격의 인터넷 매체에서 낚시질이 시작됐다. "00양 저도 벗고 싶어요"라는 제목을 클릭하면, 녹화중에 너무 더워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클릭하는 네티즌들의 머리속에는 이미 다른 상상력이 동원된 상태다. "00멤버들 불화?"라는 제목을 클릭하면 어느 모임에서 잠시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기사는 없다. 그냥 사진 한장 보고 해석한거다.


이런 류의 기사들을 포털 연예코너에 올라가고 네티즌들은 바로 '낚이기' 시작하자, 이제 바로 기존의 언론사들도 이런 낚시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곧 이런 류의 기사들을 욕하던 네티즌들마저 자신들이 쓴 글을 클릭수를 올릭기 위해 (왜 클릭수에 집착하는지는 모르지만) 낚시성 제목을 달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네티즌들인 모두 '낚시꾼'이 되기 시작했고 동시에 '낚이는' 신세가 된 것이다.


"기껏 누르고 보는데 1분도 안 걸리는데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러냐"라고 말할 수 도 있다. 언론사들의 행태는 비판받을 수 있어도, 네티즌들의 재미성 '낚시질'은 그냥 넘어가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유통'이다.


이미지라는 것은 한번 각인되고 나면 되돌리기 어렵기 때문에, 그런 제목으로 유통되는 기사 혹은 사진에 대한 느낌은 강하게 남는다. '~카더라'통신이 바로 '~다'로 확정되어 돌아다니는 것이다.


정보와 상관없는 '낚시질성 제목'이 인터넷공간이 곧 쓰레기성 정보유통의 공간으로 인식시키지 않을까 싶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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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메일을 봤네요. 지난 토요일 SBS 반전드라마에서 홍수현씨가 동방신기 멤버와 키스한 것을 가지고, 동방신기 일부 팬들이 홍수현씨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팬카페차원에서 방지하는 공지를 카페회원 전체에게 돌렸네요.


개인적으로 동방신기에 대해 이래저래 말하고픈 생각은 없지만, 이번 팬카페 차원에서 이러한 조치를 취하고자 하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그동안의 팬클럽문화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같아 씁쓸하고 한편으로는 좀더 발전적으로 나갈 수 있는 방향타를 스스로 잡는 것 같아서 좋게 보이네요.


어차피 스타는 이미지고 팬은 그 이미지를 추종하며 삽니다. 배용준씨가 일본에서 거의 신적으로 추앙받는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가 찍은 스캔들은 썩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것도 (대신 외출은 엄청난 흥행결과를) 여자를 이해하는 배용준씨의 '배역'이 먹힌거지 배용준씨 자체가 먹힌 것은 아니거든요.


이미지를 추종하는 팬이 그 이상을 요구하고 막는다면 그때부터는 팬이 아니죠.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스토커일런지도)


동방신기가 역대 아이돌스타들과 어떤 차이를 보일런지는 모르고, 실제 그의 팬들이 어떤 모습들로 다른 팬 혹은 안티들과 같이 갈런지는 모르지만, 일부라도 이런 자정적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은 앞으로 팬문화의 변화를 엿볼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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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998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의문의 권총상을 입고 사망한 고 김훈 중위의 8주년 추모미사가 있던 날이다.


김훈중위의 죽음은 '시사저널'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곧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켜 두 편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한편은 직접 김훈중위의 죽음에 대해 다뤘던 '진실의 문'이란 독립영화였고, 다른 하나는 공전의 히트를 쳤던 '공동경비구역 JSA'였다.


그러나 오늘 김훈중위의 추모미사에 대해서는 연합뉴스의 짤막한 단신뉴스로만 나왔을뿐 그 어떤 언론도 주목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무수한 뉴스꺼리때문인지, 아님 별로 사람들에게 주목받을만한 이야기꺼리가 아니였는지 몰라도, 그 어떤 언론들도 김훈중위에 대해 조명해주지 않았다.


김훈 중위의 죽음은 단순한 의문사가 아니다. 30년동안 군에 헌신한 중장출신 예비역 장성을 아버지를 둔 육군 장교의 죽음은 당시에 군 의문사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이 사건을 파고들었던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회의까지 느껴 이민결심까지 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장성출신 예비역이 자신의 특권을 이용해 아들을 죽음을 이용해 군을 괴롭히고 있다"라는 음해성 비난에 넘어갈법도 한 다른 군 의문사 가족들이 (대개는 사병출신들) 도리어 "군 장성출신의 아버지도 자신의 군 의문사에 대해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데, 우리같은 서민들은 오죽하랴"라는 반박으로 군을 난처하게 하기까지 했었다.


당시의 자료를 보면 김훈중위의 '의문사'는 결코 자살일 수 없는 결론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도 국가는 귀를 틀어막고 "자살이라는 결론은 번복될 수 없다"라며 텔레토비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권총자살한 시체 한번 못만져본 국내 법의학자들이 한국계 미국 유명법의학자의 의견에 대해 "사대주의적이다"라며, 밥그릇챙기기식 행태까지 보이며 철저하게 군 편을 들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겪은 김훈중위의 의문사를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유는 바로 아직 우리가 징집제이고 내 아들, 내 형, 내 동생, 내 연인이 언제든지 입대해 당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군이 개인의 생명을 빼앗은 범죄를 저질러 놓고도 '명예' 운운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국가에 태어난 죄로 우리는 이같은 다소 무거운 주제를 끝까지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 김훈 중위'를 '사회 문제'의 틀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해방시키며 머리속에서 놓아버린다면 이는 동시에 국가가 저질를 수 있는 또다른 범죄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방치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23일 군의문사 진상규명위가 공식 출범했지만, 아직도 그 위원회가 미덥지 못한 것은 문민정부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정부의 끊임없는 책임회피성 '액션'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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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난 붉은 악마였다. 붉은 옷은 이탈리아전부터 입었으니 겉은 조금 늦었지만, 이미 폴란드전부터 '대~한민국'을 외치며 광화문 길바닥에 앉아 응원을 했으니, 속은 그때부터 붉은 악마였다. 신났다. 경기도 경기지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았다.


무엇보다 '어느 장소'든지 모두 응원공간이였고, 붉은 악마들의 공간이 되는 것이 좋았다. 호프집이든, 길바닥이든, 친구집이든, 하다못해 일하는 사무실을 비롯해 군막사까지도 한국전이 있는 날에 대한민국 국민이 있는 곳은 모두 붉은 악마들의 응원장소가 되었다.


거기서 시작된 힘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광장문화'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이내 서울시청앞의 복잡한 도로를 서울시민에게 돌려주기도 했다.


그런 이제는 그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것은 지금뿐만 아니라, 붉은 악마가 기업화, 보다 조직화되면서 느껴졌고,  붉은 악마가 이끄는 국가대표 대항전때 응원을 가면서 분명해졌다.


지금은 국민들이 응원하는 공간이 붉은 악마의 공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포터즈에 가입했거나 혹은 붉은 악마 집행부와 스폰서계약을 맺은 기업이 주최하고 연예인을 모셔다(?)놓은 공간이 곧 응원공간이 되어버렸다.


다른 공간에서의 응원은 왠지 소외감을 낳게 만들었다. 특히 기업에서 제공하는 무슨무슨 공짜물품을 못받으면 제대로 응원하러 가지 않은 모양새까지 연출되는 꼴이 되었다.


붉은 악마는 이제 나와는 상관이 없는 조직이 되어버린 듯 하다.


2006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독일에 가서 다른 나라와 국가의 명예를 걸고 싸운다면, 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응원을 할 것이지, 붉은 악마의 자격으로 응원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은 기업화되고 상업화되고 권력화된 붉은 악마가 "대한민국 모든 국민은 붉은 악마이다"라고 말하다면 '명예훼손'으로 소송이라도 걸고싶은 심정이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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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전 MBC아나운서 실장이 성신여대 교수로 강의를 시작할 것이라는 뉴스를 들은 뒤 아쉬움이 많았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손석희는 후학을 길러내기 위해 강의를 할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손 전실장이나 엄기영 현 앵커등이 정치권에 나가지 않는 것에 대해 굉장히 올바른 결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난 이런 의견들을 보면 "그건 아닌데"라는 생각를 하곤한다.



정치권에 대해 다수의 사람들은 진흙투성이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을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들은 늘 모략과 비방으로 점철된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런 그들을 구성해주는 것은 국민이다. 솔직히 국민들이 정치인들 욕할 것도 없다. 뽑을 때 이미 거기서 거기인 사람들 세워놓고 뽑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참신한 인물 나오면 왠지 불안해서 결국은 구시대 인물 한번 더 믿어본다고 내보낸다. 그리고 다시 후회한다.


물론 지난 총선때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 세세히 보면 역시 그 물이다. 새로 국회에 들어간다고 모두 참신한 것은 아니다. 정말 바꾸려는 사람들이 참신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만 바뀌었다고 기대를 한 꼴이 된 것이다. 이번 국회 역시 그런 국민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다시 손 전실장 이야기로 돌아가자.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손 전실장이나 엄기영 앵커같이 대중적 지지도가 높으면서도 깨끗하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계속 정치권에 들어가야 한다. 손 전실장이 그렇다고 아주 바른생활 사나이도 아니다.


사적으로 오래전에 몇몇 사람들과 손 전실장과 점심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 손 전실장의 차를 타고 식당으로 갔는데, 확인은 못했지만 손 전실장은 스스로 "나 면허 취소된 상태입니다"라며, 불법유턴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식사하면서 그가 해준 이야기는 우리가 손 전실장에 대해 알고 있던 부분과 많이 틀렸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이 부정적으로 다가오기보다는 그런 '손석희'이기에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모든 면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이러한 부분때문에 손 전실장이 정치권에 나가야한다고 느낀 것이다. 그가 할말을 하면서 또한 스스로에게 있는 소소한 치부까지도 스스럼없이 말하며 상대를 설득하고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대개 정치인들은 자신과 당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뭘 요구하는지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한다. 때문에 할말을 하고 싶어도 안한다. 상대를 설득하려 하기보다는 우격다짐으로 밀어붙히려 한다. 자신을 추스리기보다는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최우선 목표가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는 다음 선거때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 전실장을 아끼는 사람들은 그가 정치에 나가지 않기를 바란다. 그가 더렵히지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이기주의라 본다. 그를 아낀다면 그를 아낄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도록, 그가 순도 100% 진흙탕속에 들어가 순도 90%로 조금이나마 떨어뜨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이후 뒤를 이어 다른 참신한 사람들을 밀어넣어 순도 80%, 순도 70%로 점점 떨어뜨려야 한다고 본다.


깨끗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새벽과 밤에 정치인들과 논쟁하는 지금이후의 손 전실장의 모습은 교수 손석희보다는 정치인 손석희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싶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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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하다기보다는 친하고픈 선배가 있었다.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당시 내 눈에는 돈도 안되고 욕만 먹는 일에 열정적으로 뛰어드는 그 모습이 굉장히 보기 좋았다. 미력하나마 내가 가진 능력으로 그를 도와주고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런 그 선배가 자신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팽'당했고, 억울한 일도 당했다고 말했다. 실제 그 선배의 일은 사회적으로도 적지않은 파장을 가져다 준 일도 있었기에 잘만 이용하면 출세는 아니더라도 '이름'은 조금씩이라도 알릴 수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 선배가 말한 그 부도덕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기에 그 선배를 믿었다.


사실 그 '팽'시킨 사람들의 도덕성도 사회적으로 무시하지 못할 위치였다. 다들 나름대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덕성과 더불어 남들은 해내지 못할 일들을 해낸 사람들이었다. 또 그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였기에 난 내 스스로가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선배가 자신을 '팽'시켰다는 사람들중 한분을 만났다. 1시간여의 대화후 난 혼란스러웠다. 내가 여지껏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을 때 스스로 모든 '진실'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자신도 모르게 보내게된다는 말을 그제서야 실감했다.


1시간여후 그 분과 식사를 한뒤에 헤어지면서 난 멍해지기 시작했다. 화가 나기까지 했다. 진실을 나에게 말했다면 난 충분히 그 선배의 열정을 믿기에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해 충분히 만회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배는 그러한 기회조차 만드려하지 않았다.


최근 난 대한민국 현대사의 진실에 관한 책을 읽고있다. 거기에는 여지껏 내가 존경한다고 생각했던 인사들의 치부가 조금씩 나온다. 물론 그것으로 인해 그분들이 여지껏 행했던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면면이 앞서 '진실'찾기에 혼란스러워하던 나에게는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 책마저도 내가 과연 믿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에 한 선배는 "진실을 반드시 찾을 필요가 있을까. 진실을 모르고 있을 때 편안할 수 있다면, 몰라도 되는 거잖아"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난 지금 내가 빠진 함정을 모르겠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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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블로그뿐만 아니라 이곳저곳에 쓰다보면 상당히 다양한 반응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이 반응은 단순히 정리하면 크게 세가지 정도이다.


첫번째는 의견에 대한 조목조목 반박이다.  내가 세상을 수백년 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이 해보는 경험을 '모두' 해보지 않았기에 당연히 내 사고방식에는 편협성이 없을리 없고, 틀린 점도 많을 것이다. 그것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글을 접할 때는 고맙고도 무서운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쓰고 싶은 글, 내가 하고싶은 말을 좀더 다듬을 수 있으니까.


문제는 두번째와 세번째다.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순식간에 나를 '적' 아니면 '아군'으로 삼아버린다.


예를 들어보면.


'차 접대'에 관한 글을 쓰고나니까, 나온 반응은 나를 여성으로 안다는 것이다. 차 접대 문제는 남녀를 떠나 자칫 소소한 문제로부터 시작한 '급'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쓴 글인데, 나를 남성사회에 불만이 많은 여성으로 인지한다. 동시에 여성들은 자기 편으로 아는 모양이다.


과거 기독교에 관한 글을 썼다. (물론 비판적) 나를 무슨 사탄 보듯이 하며 타종교인으로 인식하고 비판이 가해졌다 (비난이 옳을런지도) 난 무교다. 때문에 자유롭다. 아니 설사 내가 기독교인이라도 그런 류의 글은 충분히 쓸수 있다. (글 내용은 2002년에 한국기독교총연맹이 붉은 악마라는 용어를 폐지하고 하얀 천사 등의 용어로 대체하자고 정부에 요청한 사항을 비판한 글이였다)


우리는 이상하게 내부비판에 익숙해져있지 않다. 설사 비판이 있더라도 완화된 적당히 사정을 아는 선에서 논하게 된다. "우리끼리 왜 이래"라는 인식으로 모든 비판이 시작한다. 나랑 같은 조직에 있는 사람이 (또는 동질성을 띈 사람이) 그 조직을 비판하면 '적'이 된다.


설사 나랑 의견이 안 맞는 대치점에 있는 조직에 속한 사람이라도, 그 조직에 대해 비판을 하면 갑자기 나랑 같은 편이 된다. "적은 적은 나랑 같은 편이다"라는 공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의식이나 정치성으로 뭉친 조직은 전제에 '동질성'을 강하게 띄어야 하고 띌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동질성이 그 조직의 잘못까지도 감쌀 수는 없다.


한나라당 원희룡의원이 한나라를 비판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원의원이 한나라를 비판하면 사람들은 왜 그 사람이 그 조직에 들어가 있는가를 의아하게 생각한다. "열린 우리당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라는 비난까지 한다. 원의원이 커다른 정치적원리를 한나라와 같이하며, 사학법 반대투쟁등의 개별적 사안에 대해 반대한다는 인식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비판은 다양성을 띄며, 누구나 비판할 수 있고 누구나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고,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여기에 "우리끼리" 혹은 "우리는 같은 과인데"라는 전제가 깔리면 잘못된 것도 옳게 평하고, 옳은 것도 잘못 평하게 된다.


세상은 이분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적'과 '내 편'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 3자도 있고 제 4자도 있는 것이다.


여성직원의 차접대에 대해 글을 썼다고해서 나를 갑자기 성전환수술시킨 사람들의 댓글을 보며..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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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전에 학교사무원들의 차접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요지는 학교 사무원 (특히 여성)분들이 담당업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학교에 손님이 오거나, 학내 행사때 커피 등 차접대를 관행적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학생들에게 '도덕'적인 부분을 가르치는 선생들조차도 이러한 관행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거의 안한다는 것이였다. '당연히' 학교 사무직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을 쓰고 나서 반응은 잠깐동안이나마 대단했다. 당사자들인 사무원들은 그런 관행은 완전히 폐지되어야된다며 흥분했고, 많은 사람들도 "자판기 갖다놓고 쓰면되지 꼭 여직원이 타와야 하나"등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일부는 "요즘 직장 갖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정도 가지고 투덜대냐" "그럼 나이 많은 교장선생님이 커피 나를까" 등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학교 사무원으로 있는 후배나, 선생님으로 있는 후배들을 대하면서 모두 1년전의 상황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사무원 업무분장에 '내빈 접대'라는 항목이 완전히 사라졌는지, 또 인권위측에서 (당시에는 사례가 없다며 조치해줄 수 없다고 응답) 1년 사이 교육청 등에 어떠한 지시를 내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후배들과 사이버상의 친구들과의 이야기속에서 여전히 행사때 (극히 소수일지 아니면 다수일지 몰라도) 여 사무원들은 '차'를 나르고, 선생님이란 직업을 가진 분들도 (직접 시키지는 않더라도) 그 부분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않고 생활을 해가고 있었다.


'차'를 접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개인적 친밀감이나 '조직'이 모두 '동질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무난히 이뤄질 수 있다. 이분화된 조직의 성질속에서 한쪽은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접대'하고 '준비'하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기반으로 '대화'하고 논의를 한다면 그건 분명 부당한 것이다.


간혹 TV속에서 정규직 직원이 계약직 직원에게 "커피 부탁해요"라는 대사가 나왔을 때 어이가 없을때가 많았다. 그 방송을 보는 사람들중에 이제 막 회사에 취업하는 이도 있을테고, 그와 유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그런데 방송전파를 통해 그것을 일반화시키면 어쩌라는 것인지.


같은 부탁이라도 상황을 봐가며 하고, 상대를 봐가며 해야 한다. 학교든 회사든 여직원들이 차를 접대하러 들어가지는 않았을것이며, 회사 차원에서 그것때문에 뽑지는 않았을것다. (만일 그런 의도로 뽑았다면 그 회사는 뭔가 큰 문제가 있거나 조직이 언제가는 붕괴할꺼다)


작년 그 글을 쓰면서 '차 접대'의 문제는 이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 사람의 '급'을 규정짓는 기준을 이런 것으로부터 하나하나 만들고 인지시키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때문에 어떻게보면 '차 접대' 등의 소소한(?) 문제부터 해결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뭐든 부당한 사례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행하게 만드는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 사람과 사람이 같이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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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책이 조금이라도 더 쉽게 쓰여졌음을 은연중에 내보이는 방법중에 하나가 책명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카페' '산책' '하룻밤에' 등등.. 이 책 역시 그러한 의도일 것이지만, 동시에 그 의도에 가장 잘 부합하게 글을 썼다. 저자 황주홍교수는 가볍게 그러나 나름대로 상세하게 이 책을 써나가고 있다.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6명의 미래학자들과 그들의 주장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황교수의 간단간단한 코멘트가 연결되어 있다. 마치 강의를 하는 것처럼..황교수가 소개하는 학자들은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앨빈 토플러, 새뮤얼 헌팅턴,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비롯해 경영학도들에게는 친숙한 피터 드러커 그리고 다니엘 벨, 폴 케네디가 그 사람들이다. 설사 이들을 몰라도, '제 3의 물결' '문명의 충돌' '단절의 시대' '이데올로기의 종언' '역사의 종언' '강대국의 흥망'등의 책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 책들의 저자들이다.


미래라는 것이 학문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과거 점술 등을 통해서도 미래를 점쳤는데 '흐름'을 통한 점쟁이가 되는 것 역시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닌 듯 싶다. 이들이 말한 미래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흐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일반화되어 있기에 우리가 못 느끼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불확실하기에 불안하고 동시에 희망적이며 투자할 가치가 있는 미래에 대해 이들은 '단정적'으로 확신하며 말한다.


사실 이 책은 사기치기 용이한 내용들로 차있다. 어찌면보면 '대학생이 읽어야 하는 필독서 0권' 등에 자주 등장하는 저 위의 책들을 사실 제대로 읽어본 사람들은 드물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데 어디서 줏어들은 내용들도 읽은 양 - 혹은 너무나 많이 저 책들에 대해 들어서 스스로 착각할런지도 -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런 이들을 위해서는 이 책은 더할 나위 없는 '사기서'다. ^^. 하지만 동시에 친절한 설명서이기도 할 것이다. 저들의 책들을 모두 읽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미래적 감각'을 지닌 이들에게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후쿠야마의 트러스트를 읽을 때, 지리하다는 느낌만 받았을 뿐 이것이 왜 필독서로 되었고, 과거 내 대학때 어느 교수의 침튀기는 극찬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뻔한 이야기를 지리한 설명로 늘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역사의 종언이후 올라간 후쿠야마의 이름에 그냥 편승되어 나온 책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결론적으로 황교수의 '미래학 산책'을 한번쯤은 흟어볼 만한 책이다. 적어도 졸만큼 지루하거하지는 않다. 도리어 옆에 필기도구를 꼭 지참하고 봐야할 책 중에 하나다. - 단 출판사가 마음에 안 들었다. 조선일보사.....사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서점에서 그냥 보기에 적절하다. 아니면 빌리거나..^^;;)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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