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0년대에 봤던 ‘간첩 뉴스’가 2023년 이렇게 넘쳐나는 것을 볼 줄 몰랐다. 음지를 지향하고 양지를 지양하는 국가정보원(국정원)이 이렇게 양지를 지향하는 움직임을 또 보게 될 줄도 몰랐다. 국정원이 대공수사권을 경찰에 빼앗기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런데 설득력이 있다.
국정원과 경찰이 ‘간첩단 사건’으로 민주노총 본부 등 전국 10여곳을 압수수색을 벌였다. 민주노총은 “대통령의 사주를 받아 국정원이 메가폰을 잡은 '한 편의 쇼'였다. 단 한 명의 책상 하나를 압수수색하는 데 1000명의 경찰이 동원되고, 에어 매트리스까지 등장했다. 무엇이 목적이겠냐. 해외 순방 중 발생한 대통령의 외교 참사를 돕기 위한 것이다. 내년이면 경찰로 이관되는 국정원의 대공 수사권을 지키기 위한 바람이다. 위헌 판결을 앞두고 있는 국보법을 지키기 위한 만행”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 ‘경찰로 이관되는 국정원의 대공 수사권을 지키기 위한 바람’이란 부분이다. 그간 국정원이 갖고 있던 대공수사권이 지난 2020년 더불어민주당 단독으로 처리한 국정원법 개정으로 내년 경찰로 이관될 예정이다. 그런데 국민의힘이 이번 일을 빌미로 ‘북한 때문에 위험하다’라는 주장을 강조하면서 국정원법 재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럼 각 정당의 주장을 한 번 보자
일단 이번 일을 ‘북풍’에 가까운 상황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국민의 힘.
정진석 “간첩사건이 밝혀질 때마다 종북세력들은 공안몰이라면서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 자유민주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6년까지 간첩 적발 건수는 모두 26건으로 연간 4건 이상이었는데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7년부터 2020년까지 간첩 적발 건수는 총 3건에 그쳤다. 그마저도 박근혜 정부 시절 인지해서 수사하던 사건들이었다. 문재인 정권이 국정원 개혁이란 구실 아래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폐지했다. (이 때문에)국정원의 대공수사능력이 현저히 저하됐고 간첩을 잡아야 할 국정원이 남북 대화 창구로 전락했다. (북한의) 김정은은 '핵탄두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 언제든지 전술핵 무기로 한반도 남쪽을 타격하겠다'고 호언하고 있다. 간첩단을 우리 사회 곳곳에 침투시켜 내전을 부추기려 혈안이다. 이번 기회에 대공수사 능력을 총동원해 사건의 전모를 낱낱이 밝혀내고 사회 곳곳에 은닉하고 있는 간첩세력을 발본색원해야 한다”
성일종 “대한민국 곳곳에 북한의 암세포가 퍼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간첩단 수사를 막거나 방치한 게 사실이라면 이는 이적행위다. 활개 치는 간첩 실상을 알고도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폐지했다면 국가해체행위를 한 것이다. 국가 보위의 최첨단 노하우를 갖고 있는 국정원의 손발을 자른 책임을 민주당이 져야 한다. 민주당이 국가해체행위를 한 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국정원법을 복원시키기 바란다”
그럼 이제 더불어민주당 주장이다.
김성환 “(간첩단) 사건의 실체는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국정원이 내년 경찰로 이관되는 대공수사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해당 사건을) 활용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과거 국정원은 무수히 많은 무고한 국민들을 간첩으로 조작해 국내 정치에 이용했던 전력이 있던 집단이다. 국민들이 이제야 ‘막걸리 보안법’ 걱정은 안 하고 살았는데 이마저도 과거로 돌릴까 우려된다. 국정원의 개혁은 계속돼야 한다”
이수진 “(간첩단 사건 관련 민주노총 본부 압수수색에 대해선) 당 차원의 대응 등 공식 입장은 없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국정원으로 다시 대공수사권을 이관시키겠다는 법안을 발의한 바 있는데 이후 이런 일들이 진행됐다”
그리고 존재감이 많이 사라졌지만, 어쨌든 존재하는 또다른 여당인 정의당.
이정미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결코 경찰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국민의힘 지도부의 발언 이후 계획이라도 한 듯 진행된 압수수색이다. 혐의자들에 대한 인신구속절차도 없었고 엄연히 다른 조사방법이 있었음에도 노동자들과 간호사들의 사무실과 심지어 세월호 쉼터까지 수백 명의 병력을 동원해 공안 분위기를 연출했다. 동네방네 ‘저기 간첩혐의자가 있어요’ 외치며 수백 명이 건물 둘러싸고 압수수색한다는 경우는 세상천지에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정의당은 국정원 대공수사권 유임을 시도하며, 국정원의 국민 사찰, 여론조작을 또 다시 허용하려는 정부·여당의 그 어떤 시도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은주 “대대적인 물리력과 언론보도를 동원한 이번 압수수색은 비밀 수사, 일망타진이라는 대공수사 원칙도 스스로 깨버린, 공안몰이였다. 국정원 대공수사권의 경찰 이관이 1년 앞으로 다가왔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자기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조직보위적 위력시위다. 그런다고 대공수사권 이양이 철회되지 않는다. 국가 안보기관답게 보수 정부의 충견 노릇이 아니라 국가 안보에 집중하기 바란다.
여기에 조선일보가 불을 질렀다. 문재인 정부가 ‘간첩단 사건’ 수사를 막았다고 보도했다. 이에 문재인 정부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을 지낸 윤견영 민주당 의원이 반박했다.
“단언컨대 문재인 정부는 국정원의 대공 수사에 대해 청와대가 이래라 저래라 한 적이 결코 없다. 대통령이 입만 열면 전임 정부 탓을 하더니, 이제는 퇴직한 공무원들까지 따라하는 모양이다. 익명에 가려진 전직 당국자의 '입'만으로 전임 정부가 간첩 잡는 것을 막았다고 우기고 있다. 국익을 해치는 간첩을 잡는다는데 거기에 다른 계산이 작용할 일이 뭐가 있겠나. 제발 전임 정부 탓은 이제 그만하라. 더욱이 간첩 수사는 소매치기범 잡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혐의가 있다고, 현행범으로 당장 체포할 수 없는 수사라는 얘기다. 은밀히 숨어 있는 조직을 최대한 파악해서 가장 윗선이 어디인지를 알아내야 하고, 물증도 최대한 확보해야 일망타진이 가능하다. 당연히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이름표 달고 대놓고 간첩 활동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최근 수사에서 더 기이한 일은 또 있다. 간첩 수사는 보안이 생명이라, 수사 중일 때는 국회를 비롯 그 어떤 곳에도 보고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어떻게 최근에는 매일 같이 언론에 관련 수사 조각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흡사 언론 플레이를 하는 듯하다. 조용히 수사해도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기 마련인 것이 간첩 수사인데, 온 동네 시끄럽게 해서 제대로 된 수사가 가능할까. 간첩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망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간첩 수사의 A B C를 무시한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렇다.
국정원은 대공수사권을 경찰에 넘기기 싫어한다. 그리고 이러한 뜻을 국민의힘에 전달했다. 그러면서 뭔가 또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간첩단 사건을 언론을 통해 터트린다.
‘간첩’에 대해 현재 40대 이하의 국민들은 “또 시작인가”라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겠지만, 60대 이상의 국민들은 “빨갱이들”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결집하기 좋다. 여론이 분열돼도 어차피 국정원의 목적은 대공수사권 지키기일 뿐 다른 목적은 없다.
여기에 윤석열에게 눈엣가시인 민주노총을 비롯해 시민단체들을 협박할 수 있기까지 하다. 즉 주군의 충견으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킬 수 있는 묘수가 된다. 마침 북한과 윤석열이 서로 으르렁 대고 싸운다.
언론에 터트린 간첩 관련 내용을 국민의힘이 받아서 대공수사권 재개정을 주장한다. “저게 없으면 대한민국 망한다”라는 프레임을 짠다. 그리고 이것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은 ‘빨갱이 몰이’로 갈 준비를 한다. 민주당과 정의당이 반발하면, 그들에게 “북한에 협력하는가”라는 프레임으로 몰고 가면 된다.
그런데 이거 언제인가 많이 보던 흐름 아닌가. 박정희-전두환 시대 때 횡행하던 장면 같다.
물론 간첩이 있다면 잡아야 한다. 이를 부정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터전을 흔드는 이들을 받아들일 국민은 없다. 그런데 정의당이 잘 지적했듯이 무슨 간첩을 지역 축제처럼 다양하게 홍보하면서 잡는 것일까. 국정원에서 일해 본적이 없지만, 이렇게 동네방네 알리면서 간첩 잡는 것이 맞는 것일까.
위에 국민의힘과 국정원의 관계를 단순히 추측이라 생각하지 말자. 이는 추측이 아닌 둘이 그동안 간첩을 ‘잡은’ 것이 아니라, ‘만든’ 과거가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나오는 합리적인 의심이다. 대한민국 국민을 향해 총을 쏴달라고 부탁한 단체가 지금의 국민의힘과 국정원이다.
부디 바라는 것은 이번 간첩단 사건 어쩌구 하는 상황이 국정원의 밥그릇과 국민의힘의 공안정국 조성, 윤석열의 정부 비판 단체를 모조리 억압하기 위한 판은 아니길 바란다. 기대치가 낮긴 하지만.
그리고 하나 더 강조하면, 간첩이 있으면 잡아야 한다. 이를 남북관계 때문에 뭉개선 안된다. 그러나 없는 간첩을 만들어 내면 안된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 때문에. 즉 안보에 관련해 여야든, 국정원이든 국민의 신뢰부터 먼저 쌓길.
-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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