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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버스를 타면 사람들의 표정을 보곤했는데, 이제는 마스크 때문에 다들 표정이 없다. 아니 안 보인다.



그래서 어느 때는 뒷모습을 보는 게 더 재미있을 때가 있다. 물론 대부분 스마트폰 보느냐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다양하게 삶이 보인다.

말리지 못한 머리도 보이고, 눌린 머리도 보이고, 탈모로 고민하는 듯한 뒷모습도 보이고. 그래서 차보다는 지하철이, 지하철보다는 버스가 그리고 버스에서도 뒷자리가 잼난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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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기사의 내용이 이렇다.

4일 국내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지하철에서 생긴 일'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작성자에 따르면 지난 3일 서울 지하철 3호선에서 한 여성이 쓰러졌다. 작성자는 “쓰러진 여성이 짧은 반바지에 장화를 신고 있어 신체 노출이 조금 있었다. 때문에 해당 칸에 있던 어떤 남성들도 그 여성을 부축하거나 도울 생각을 하지 않더라. 결국 아주머니들과 젊은 여성들이 도와서 지하철 밖으로 여성을 부축해 나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중략>

한편 지난달 8일 한 음식점 화장실에서 쓰러진 여성을 부축하다 성추행범으로 몰린 남성이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남성 A씨는 여성 B씨가 지난해 대전의 한 식당 화장실에서 문을 닫지 않은 채 구토를 한 뒤 밖으로 나오다 자리에 주저앉자 그를 일으켜 세워줬다. 이 과정에서 B씨는 A씨가 자신의 신체를 만졌다며 경찰에 신고했으나 A씨는 쓰러져 있던 B씨를 일으켜 준 것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엽기적인 그녀’ 장면.



예상했던 대로 댓글에서 난리다.

대부분의 의견은 “여자가 쓰러지더라도 도와주지 마라. 잘못하면 성추행범으로 몰린다”이다. 아마 남성들일 것이다. 이 흐름은 이렇게 이어진다.

“사람이 쓰러졌는데, 그런 것을 따지면서 도와주냐. 일단 도움부터 주고 봐야지”

→ “그거 한번 도와주고, 신고 당하면 어떡하냐. 경찰서 가고 법원 가는 거 누가 책임지냐”

→ “너희 엄마가, 누나가, 여동생이 쓰러져도 그렇게 행동할 것이냐”

→ “내가 다른 여자 도와주다 성추행범으로 몰리면 엄마, 누나, 여동생 얼굴은 어떻게 보냐”

뭐 대충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답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커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길에서 사람이 쓰러져도 무시하고 지나가는 중국의 행태를 비난할 상황이 아닌 셈이다.

이런 흐름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남자들은 페미 운운하는 일부 여성들을 비난하지만, 여자들은 자신들은 성적 대상으로 생각하는 일부 남자들을 비난한다.

생각하보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자’라는 상식이 무너지는 세상이 되고 있는 셈이다. 남녀 갈등에 의해서 말이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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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다. 하루 사이에 난 죽일 놈과 나쁜 놈이 된 적이 있다.


비오는 날 지하철역에서 내리는데 어느 할머니가 비를 맞고 계셨다.


아침 출근시간이라 다수의 사람들은 눈길만 주고 자신의 갈 길을 갔다. 나 역시도 그다지 여유있는 시간대는 아니었다. 그런데 집에 있는 할머니를 생각하니, 왠지 하루종일 찜찜할 것 같아 할머니가 가고자하는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렸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기에 중간중간 쉬기까지 했으니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쉴때나 혹은 목적지에서도 난 한없이 착한 놈이 되었다. 나같은 녀석을 둔 부모님은 순식간에 가정교육의 모범으로 이야기되었고, 난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모범시민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난 30여분 회사에 지각했다.


퇴근길. 비오는 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상하게 몸이 무거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들보다 늦게 퇴근한 덕에 여유있는 지하철을 탔다. 모두 자리에 앉아있고 노약자석만 자리가 비어있었다. 누군가 타면 양보해주면 된다는 생각에 앉았고, 얼마 걸리지 않아 나도 남들처럼 졸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수군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몇개의 역을 지나면서 지하철 안은 꽤 많은 사람들이 탔고, 내 앞에는  몇몇 할머니가 서 계셨다. 어느 아주머니는 혀를 차며 나를 쳐다봤다. 순식간에 난 죽일 놈이 되었다. 급히 자리를 양보해드렸지만 이미 대세를 기울었다.


하루 사이에 착한 놈과 나쁜 놈를 모두 체험했다. 둘 다 선의도 악의도 없었다. 하루종일 찜찜할 것 같아 우산을 씌워드린 것이고, 뺏고자하는 마음에서 노약자석에 앉은 것도 아니었다.


난 그때부터인가 하나의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은 어떠한 처지에 있을 지 모르고, 하나하나의 행동이 어떠한 평가를 받을지 모른다. 그것에 스스로를 추스리지 못한다면 결국은 자신만 손해고, 평생 무엇인가 등에 얹고사는 기분을 가질 것이다.


요즘처럼 사람들이 누군가의 말에, 행동에 '욱'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위태위태해 보인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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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면 한 칸 양 옆에 6자리씩 12개의 자리가 노약자석으로 되어있다. 그 자리는 노인 (대략 65세이상), 장애인, 임산부 등을 위해서 마련된 자리다. 그런데 지하철을 아침저녁으로 타다보니 그 자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생각의 발단은 후배가 "노약자석을 없애면 안될까"라는 말을 하고부터이다.


며칠 전이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 한분이 지하철에 타셨는데, 그 위치가 지하철 한 가운데였다. 노약자석을 제외한 나머지 자리에는 모두 승객들이 앉아있었다. 할머니가 타시자, 자거나 자기만의 일에 심취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노약자석쪽을 힐끔힐끔 보기 시작했다. (차량안에 서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노약자석이 빈 것이 그냥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도 노약자석으로 발을 옮기셨지만, 차량의 움직임때문에 쉽지 않았고, 결국 한 학생이 자리를 양보했다.  그리고 그 학생은 그대로 서있었다. 나머지 승객들의 표정은 그제서야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후배의 주장을 옮겨보자 "한 가지 상황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 상황은 모두 무언의 '공범' (구체적으로 죄가 뭔지는 모르지만)이 된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노약자석. 그자리가 지하철내 사람들의 심리적인 안식을 주기도 하고, 동시에 갈등도 주며, 또한 동시에 불안감을 주기도 하는 자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그 자리가 법적으로 반드시 노약자가 앉아야 된다고 규정되어 있지도 않다. 단지 우리나라 미덕의 차원에서 마련된 자리고, 뻔뻔한 젊은이가 버티고 앉아있다고 해서 신고할 수도 없는 공간이다. 그런데 그 자리가 존재해 일순간 사람들에게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노약자석을 제외한 모든 자리에 사람이 앉아있는 상황에서도 그 자리는 앉기가 꺼려진다. 자리에 앉더라도 불편하다. 매번 문이 열릴때마다 쳐다보게 된다. 그래서 아예 서서 가게된다. 물론 젊은 나이이기에 서서 가도 무리가 없다. 그런데 내 몸이 조금 안좋더라도 그 자리는 여전히 심리적 벽이 쳐져있는 듯 하다.


후배은 다시 "노인분이나 임산부, 혹은 어딘가 다치신 분이 타면 대부분 자리를 양보합니다. 굳이 노약자석이라는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노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라고도 말할 수도 있지만, 법적으로 강력하게 규제하는 것도 아니고, 상시 누군가가 그 자리를 지키고 규제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내 후배를 욕할 것이다. 과거 전에 어떤 신문 독자투고에서 "지하철에 사람이 만원이라도 노약자석이 비워있어야 아름다운 모습일 것 같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조금 힘들더라도 젊기에 노약자석은 누군가를 위해 비워놔야 한다는 주장과 "노약자가 타면 당연히 자리를 대부분 양보하기에 굳이 선을 그어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비워놔야 하는가"라는 주장 사이에서 얼핏 간단한 것 같지만 선뜻 답을 내리기 어려운 이유는 왜일까.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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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orn site teen young 2008.03.13 05:46

    너는 아름다운 웹사이트가 있는다!

  2. 8개월 임산부 2011.10.13 07:58

    임산부 입장에서는 그나마 그 자리도 감사할뿐이네요. 양보의식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3. 8개월 임산부 2011.10.13 08:00

    임산부 입장에서는 그나마 그 자리도 감사할뿐이네요. 양보의식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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