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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깽. 선인장과에 속하는 용설란의 일종으로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특산물로 가시가 많고 독소가 많으며 밧줄과 카펫의 원료로 재배되고 있다. 애니깽. 1904년 멕시코에 노예로 팔려간 조선인들과 그 후예들을 일컫는 말

 

 

불행하기에 행복을 느낀다 - 연극 '해피투게더'

오랫만에 소극장 연극을 봤다. 소극장 연극은 보는 동안은 즐거움을 보고나서는 유쾌함을 느낀다.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배우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읽을 수 있고, 더불어 숨소리까지 느껴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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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441,033명의 조선인들이 멕시코로 가는 영국선박 일포드호에 몸을 싣는다. ''지상천국''. 멕시코 애니깽 농장에 대해 이들이 들은 말이였다. 그러나 한달 반만에 도착한 그곳은 지옥보다 더한 곳이였다. 7등민족으로 대우받으며 하루에 1천개의 애니깽 잎을 따지 않으면 가죽채찍으로 맞아야 했으며 농장주인의 개를 부러워할 만큼 열악환 환경에서 조선인들을 서서히 죽어갔고 애니깽 농장의 거름이 되었다.

 

연출가이자 작가인 고 김상열씨가 1988년 세상에 알린 이 이야기는 당시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널리 알려진 하와이 이민이 아닌 ''노예''로서의 멕시코 송출. 가슴 아픈 슬픈 역사는 연극 무대에 올려지면서 알려졌고, 이후에 영화, 뮤지컬로 바뀌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리고 18년뒤 애니깽은 다시 무대에 올라 100년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연극은 관객들에게 눈물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역사를 똑바로 알라고 소리치지도 않는다. 그냥 100년전 현실을 차분하고 때론 강렬하게 알려주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관객석은 이러한 무대위 상황과는 달리 무거운 공기가 흐른다. 눈물 짜는 소리와 더불어 가슴이 답답해져오는 느낌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마지막 외침이 끝난 후, 배우들이 무대 위에 오르자 그 어느 연극보다도 길고 우렁찬 박수가 나왔다.

 

사실 젊은 세대들에게 멕시코 이민역사와 애니깽이란 단어는 익숙치 않은 말이다. 1988년 연극과 1997년 영화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단순히 역사속에서만 존재하는 잊혀진 단어로 남아있다. 그러나 박근형 연출가는 의미를 달리했다.

 

"생각해본다. 2050년 어느 날 우리들의 모습을. 시청 앞에 펄럭이는 이국의 국기에 경례하는 우리들을. 새로 배우고 익혀야 할 낯선 우리들의 모국어를. 다시 또 노예처럼 살아야 할 우리들의 미래를"

 

궁녀역을 맡았던 한보경 김상열연극사랑회 대표 역시 이러한 세태에 대해 "요즘은 싫은 것, 아픈 것은 너무 잘 잊어버린 것 같다"며 지적했다.

 

"단순히 연극으로 보는 ''애니깽''이 아니라 기억해야 할 역사로서 ''애니깽''을 좀더 알아야 할 것 같습니"라며 연극소감을 남긴 한 관객의 평가는 지나쳐 들을 말은 아닐 듯 싶었다.

 

연극 ''애니깽''29일까지 대학로 아룽구지 소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난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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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역들이 건보료 폭탄을 맞았다. 건보공단 실수로 수십만원어치 건보료가 체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않고 "그냥 내시오"로 일관한다. 이 때문에 건보공단에 몇 번 전화를 하며서 이 조직이 굉장히 편한 조직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1. 본사가 아닌 지사에 전화해서 "이번 군 전역자 체납 문제 어떻게 할겁니까" 문의..

 

- 지사는 모르고 있다. 며칠 전에 뉴스에도 나왔고 건보공단 홈페이지에 해명자료까지 올라가 있는데, 지사에서는 어떤 지시도 받지 못했고 상황파악 하지 못하고 있다.

 

2. 재차 전화해 추궁 및 왜 이런 문제 생겼는냐 문의

 

- "죄송합니다. 그러나 일단 내셔야 합니다" 끝이다. 지사든 본사든 모두 같은 말이다. 여기서 건보공단의 편안함을 느꼈다. 국민들 난처하게, 혹은 궁지에 몰아넣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 "죄송합니다". 마치 칼로 사람 난도질하고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을 무마하려 하는 것이다. 개인이 그렇게 했다면 사형감일텐데, 건보공단은 '편안'한 삶을 영유한다.

 

3. "돈 낼테니 지로 다시 보내세요"

 

- 추석 중간에 안내서가 날라왔다. "10일에 자동이체 됩니다"...자동이체 이미 해지한지가 언제인데, 이런 안내서가 날라올까. 지로를 다시 보내달라는 말은 그냥 무시하고..전화했더니, 그제서야 "아 확인됐습니다"라고 말한다. 건보공단은 국민이 자동이체 해제해도 먼저 전화해서 신고해야 하는가.

 

4. "카드는 꼭 지사로 가야합니까"

 

- "네 그래야 합니다" "죽어도 그렇게 해야 합니까" "네" "왜 그래야 하죠" "원칙입니다"

 

상담직원이 왜 카드로 해야하는지 교육조차 안됐다. 홈페이지를 뒤져서 확인하니 (그것도 나도 한마디란 뒤져서) 수수료때문이라고 나온다. 연 200억이 들어가는데, 만일 이 수수료를 받으면 불가피하게 건보료를 올려야 한다고 한다. 죽어도 자기들 월급 깎거나 다른 누수되는 돈을 절약해 충당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카드 사용하려면 건보료 올려야 한다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10월 8일자 뉴스에 '노는 해외연수'간다는 뉴스 들으니 정말 대한민국을 왜 사람들이 떠나는지 이해가 갔다.

 

몇 번 전화통화하면서 건보공단 직원들은 모두 텔레토비가 아닌 듯 싶었다.

 

"내세요. 죄송합니다. 내세요. 죄송합니다. 내세요"를 반복하는 단순한 텔레토비 말이다.

 

건보료를 내겠다고 해도 제대로 걷어가지 못하고,  실수는 무조건 국민탓으로 돌리는 이 직장, 이 조직....정말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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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소설이 연극 혹은 영화화되면 출연하는 사람들은 부담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원작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태백산맥이라든가, 아버지 등의 소설이나 강풀의 만화 아파트 등이 그렇다. 원작을 살리지 못한 댓가는 참혹했다.

 

 

마음이 떠나버린 자들을 맞이하는 연극 '임차인'

영화 '괴물' 목소리의 주인공이자 충무로 조연의 중심에 서있다는 평가를 받는 오달수가 출연한다고 해서 주목받고 있는 연극 '임차인'. 그러나 연극을 보고 있자면 스타로 부상한 오달수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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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미라클

 

연극 '미라클'의 출연진은 이와 다르게 10회 앵콜 공연이라는 것이 어깨를 무겁게 한다. 이전까지 보여준 '미라클'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 때문이다. 연극은 그 특성상 한번 보고 넘어가기 보다는 대부분 새로운 인물로 채워진 연극을 또다시 보고싶어한다. '미라클'과 더블어 연극 '아트'등이 대표적이다. 같은 줄거리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어떤 사람이 나오냐에 따라 맛이 확 달라진다. 때문에 "이전 배우들보다 재미가 없던데"라는 말은 "그저 그런 연극""볼 만하다"는 등의 처음 본 이들의 악평보다 더 잔인한 평가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이번 앵콜 미라클은 그 기대치를 충족시켰고 또다른 웃음과 감동을 주는 새로운 '미라클'을 보여주며 그 명성을 충분히 이어가고 있다.

 

12월 31일까지 대학로 미라클 시어터에서 공연되는 연극 '미라클'. 10회 앵콜공연에 10만 관객 관람이라는 기록은 이 연극이 이미 대학로의 명실상부한 대표 연극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연극의 줄거리를 말한다거나 관객들이 어떤 호응을 보인다는 등의 이야기는 새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검색해보면 나오고, 설사 내용을 모르고 '명성'만 듣고 찾아간다고 해도 전혀 후회하지 않을 정도다.

 

'해피투게더', '한 여름밤의 꿈' 등에서 독특한 캐릭터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번에도 관객들에게 웃음과 눈물을 모두 선사하는 역할을 맡은 배우 맹상렬은 "극 전체가 굉장히 명랑하고 ''미라클''이라는 제목처럼 기적을 바라는 주인공들의 간절한 마음이 잘 표현되는 연극이다"라고 평했다. 맹상렬이라는 배우는 개인적으로 해피투게더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배우다. 웃길 줄 알고 진지할 줄 안다.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힘도 있다.

 

어쨌든 "정말 재미있어요. 이 연극을 보면서 웃지 않거나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는 사람은 요즘 어떤 개그프로그램의 유행어처럼 3살때 웃음을 잃어버린 사람일겁니다"라는 한 네티즌의 공연평은 이 연극이 어떤 연극임을 말해준다.

 

간혹 연극을 보고난 후 배우들과 같이 극장을 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들이 옷을 갈아입고  무대위 사람이 아닌 현실속 사람으로 변한 모습을 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보여주는 얼굴이 아닌 자신의 인생의 무대로 돌아온 얼굴들은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을 준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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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후 다시 관련 글을 쓰겠지만, 이제 세상은 생산자가 권한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선택과 유통을 쥐고 있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뉴스 생산을 하는 언론사가 선택후 유통을 시키는 포털사이트를 이기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수많은 물품 생산자들이 대형 마트에 꼼짝못하는 것도 그렇다. 생산품이 절대적으로 우월성을 보이지 않는 이상 절대로 '선택후 유통자'를 이기지 못한다.

 

더욱이 수많은 정보가 빛의 속도 이상으로 소비자들과 대중에게 접근되는 지금은 더더욱 이들의 힘은 커진다. 거꾸로 대중과 소비자들마저 이들에게 먹혀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선택한 물건과 정보가 곧 '최상품'으로 되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두번정도 가는 영풍문고에 어이없는 책배열을 어제 봤다. 수십만권의 책중에서 그렇게 모아놓은 이유를 점원에게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였다. 책을 쓰고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 어떻게 보여질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프라인 책 매장에서 '선택후 유통자'인 대형 서점만이 할 수 있는 것이였다.

 

코너명은 "시대흐름의 뉴스읽기"였다. 앞뒤 배치로 되어있지만 뒤의 배치는 국제문제가 주로 있기에 무의미하고 앞에 배치된 책 명만 살펴보자.

 

*김대중의 정체(조갑제)

*대한민국 적화(赤化)보고서(조갑제)

*박정희 시대의 재조명

*박정희 정권중 경제개발

*한국국민에게 고함(박정희)

*박정희를 말하다

*대한민국과 결혼한 박정희

*모성정치가 나라를 살린다(근혜사랑 나랑사랑)

*fta국민보고서 (FTA저지범국민 운동본부)

*전작권 오해와 진실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윤재걸 정치평론집 '엽기공화국'

 

박정희와 박근혜를 찬양하고 김대중과 현 정권을 죽이는 것이 '시대흐름의 뉴스읽기'였던가? 조갑제가 월간조선을 맡고나서부터 정상적인 기자의 패턴을 벗어나 오기만 남은 늙은이로 변해가고 있음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책이 전면에 배치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 책들의 배열은 분명 "영풍문고 사장이 한나라당을 모시기로 했나"라는 추측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시대흐름의 중심에 박정희, 박근혜, 조갑제가 서 있는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지금이 1960~70년대인가?

 

또 나도 한미FTA이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풍문고의 저 책들의 배치는 아예 잘못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한낱 책 배열따위를 가지고 무슨 어이없는 생각을 하냐고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음에 말했듯이 생산자와 소비자는 중간 '선택후 유통자'를 이기지 못한다. 대형서점을 찾는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러오기도 하지만,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약속장소나 최근 사회의 흐름, 유행 등을 알아보기 위해서도 온다. 그리고 그들이 눈을 처음 두는 곳이 '신간''가장 많이 나간 책''베스트 서적' 등등으로 치장된 최일선 배치 책들이다.  통로에서 멀리 떨어져 세로로 나란히 배열된 책들이 아니라 통로 사이드에 배치되어 면이 천장을 바라보며 쌓여있는 책들인 것이다.

 

이 책들이 서점을 자주 찾는 이들 혹은 서점에 대한 신뢰를 갖는 이들에게는 바로 최근 뉴스이고 최근 경향이고 최근 사회의 흐름인 것이다.

 

'선택후 유통자' 가 공정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역시 나중에 자세히 말하겠지만, 공정성과 객관성, 평등성은 이 사회에서 잘못 정착된 개념이다. 언론사가 반드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위치를 점해서는 안된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외부로는 공정성이란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문제) 또한 포털사이트 뉴스배치가 어느 한 편을 드는 것 역시 문제가 될 수 없다.

 

진짜 문제는 '선언'이다. 어디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하거나 그러한 일정한 성향을 끊임없이 내보이는 것이다. 또다른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제공하는 공간이냐는 것을 규정짓는 부분이다. 스스로가 제공하는 것에 관한 성향을 이미 끊임없이 규정지었으면서도 이것을 이탈하는 문제다.

 

영풍문고에 딴지를 거는 이유는 후자의 이유때문이다. 문화적 공간, 즉 스스로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끊임없이 규정했던 대형서점이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규정된 부분이외를 벗어나는 것이다.

 

영풍이 말한 문화적 풍요로움이 2006년에 박정희가 시대흐름이 되는 상황을 강제시키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해소리-

 

ps..'선택후 유통자' 가 과거에도 물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인 언론사들...그러나 이들은 스스로가 생산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위에서 거론한 것은 전문적으로 이것만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이 곧 권력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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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은 것은 다른 사람보다 먼저 텅 빈 무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배우들이 땀을 흘리며 이야기를 풀어 나갈 공간을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접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느 순간보다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첫 연극을 어떤 것을 봤는지 기억이 안난다. 고등학교때 자리수를 채우기 위해 강제로 보러 간 '햄릿'이 첫 연극일 수도 있겠고, 갑자기 생긴 초대권에 가 본 대학로 어느 연극이 나의 첫 무대경험(?)이였을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왜 그런지도 모르게 연극이 좋아졌고, 기회가 되는대로, 혹은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 공연장을 찾기 시작했다.

 

국립극장같은 대형극장에서부터 20여명이 앉아서 보는 대학로 소극장까지 배우들의 숨결이 느껴질 수 있는 공간이 무조건 좋았다. 물론 이후에는 배우들의 숨결을 느끼기 힘들어지는 대극장은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아무튼 2만원짜리 연극은 배우들이 말하고 뛰는 사이에 '''사람'을 보게 된다. 영화는 허상이지만, 연극은 현실이다.

 

사람들은 영화도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영화가 현실을 말했다가는 망하기 쉽다. 일명 흥행한 영화와 일찍 간판을 내린 영화를 비교해보면 알 것이다. 현실의 이야기를 그리는 순간 영화는 사람들의 맘 저편으로 물러나 버린다.

 

하지만 연극은 아니다. 애시당초 비현실적 이야기를 그릴 수 없기에 철저히 현실적 이야기를 만든다. 죽은 자의 영혼을 등장시키는 연극조차도 현실적으로 변해버린다. 무엇보다 그 영혼의 역할을 하는 배우가 우리 앞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영화는 모두 다른 공간에서 찍어서 영화극장이라는 상영 공간을 만들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객에게 선보인다. 메시지보다는 이미지를 선사해야 하기 때문에 '거리''위치'가 중요하다. 사운드가 어떻게 들리냐도 중요하고, 그에 따른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연극은 한 공간에서 만들어진다. 소극장은 거리마저 생략된다. 배우가 관객석에 앉아있기도 하고, 통로에서 튀어나온다. 이미지보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거리''위치'보다 관객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을 중요시 여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눈 앞에 보이는 배우들의 땀을 보여준다.

 

영화를 비하하고픈 마음은 없다. 건물이 무너지는 모습을 연극에서 보여줄 수는 없다. 미스 사이공의 헬리콥터 장면이 "그나마 연극에서 저정도 구현되는 것이 어디냐'는 촌평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계가 있는 것이다. 거대함, 시공간의 자유로운 이동 등은 분명 영화의 강점이다.

 

강조하고픈 것은 영화나 연극을 '' 보러가느냐는 전제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선택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웃고 울며 즐기고 싶다면 단연 연극이다. 반면 그냥 스트레스 해소나 가볍게 현실 이탈정도라면 영화가 제격이다.

 

사실 연극 한편이 2만원, 사랑티켓 혜택을 받거나 해서 보더라도 1만원 안팎이다. 게다가 하루에 한번밖에 보지 못하거나 주말에 2회 상영이 고작인데다가 극장도 많지 않다. 반면 영화는 싸고 편하다. 7천원, 할인혜택을 받으면 3천원까지도 혜택을 받는다. 어느 때고 볼 수 있고, 접근성도 용이하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연극을 쉽게 접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난 이런 생각을 한다. 영화가 과연 7천원 (혹은 3천원)의 가치가 있을까. 어느 때는 1천원짜리 가치밖에 없는 영화를 웬지 7천원씩이나 주고 봤다는 생각이 들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물론 박수 칠만한 영화도 있다. 소수이긴 하지만).반면 연극은 지금까지 단 한편 (아래 혹평한 창작 뮤지컬)을 빼고는 5~10만원짜리 연극을 1만원~2만원 주고 봤다는 생각이 들때가 대부분이다. 1시간 30분동안 무대위 배우들의 열정을 보면 그 이상의 가치도 부여하고픈 마음이 든다.

 

연극과 영화. 위에서 풀어낸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하면 어떻게 비교대상이 되냐고 말한다. 맞다. 비교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선택'을 할 수 있는 인간이 비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교 비슷한 행위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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