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글을 블로그뿐만 아니라 이곳저곳에 쓰다보면 상당히 다양한 반응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이 반응은 단순히 정리하면 크게 세가지 정도이다.

 

첫번째는 의견에 대한 조목조목 반박이다.  내가 세상을 수백년 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이 해보는 경험을 '모두' 해보지 않았기에 당연히 내 사고방식에는 편협성이 없을리 없고, 틀린 점도 많을 것이다. 그것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글을 접할 때는 고맙고도 무서운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쓰고 싶은 글, 내가 하고싶은 말을 좀더 다듬을 수 있으니까.

 

문제는 두번째와 세번째다.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순식간에 나를 '적' 아니면 '아군'으로 삼아버린다.

 

예를 들어보면.

 

'차 접대'에 관한 글을 쓰고나니까, 나온 반응은 나를 여성으로 안다는 것이다. 차 접대 문제는 남녀를 떠나 자칫 소소한 문제로부터 시작한 '급'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쓴 글인데, 나를 남성사회에 불만이 많은 여성으로 인지한다. 동시에 여성들은 자기 편으로 아는 모양이다.

 

과거 기독교에 관한 글을 썼다. (물론 비판적) 나를 무슨 사탄 보듯이 하며 타종교인으로 인식하고 비판이 가해졌다 (비난이 옳을런지도) 난 무교다. 때문에 자유롭다. 아니 설사 내가 기독교인이라도 그런 류의 글은 충분히 쓸수 있다. (글 내용은 2002년에 한국기독교총연맹이 붉은 악마라는 용어를 폐지하고 하얀 천사 등의 용어로 대체하자고 정부에 요청한 사항을 비판한 글이였다)

 

우리는 이상하게 내부비판에 익숙해져있지 않다. 설사 비판이 있더라도 완화된 적당히 사정을 아는 선에서 논하게 된다. "우리끼리 왜 이래"라는 인식으로 모든 비판이 시작한다. 나랑 같은 조직에 있는 사람이 (또는 동질성을 띈 사람이) 그 조직을 비판하면 '적'이 된다.

 

설사 나랑 의견이 안 맞는 대치점에 있는 조직에 속한 사람이라도, 그 조직에 대해 비판을 하면 갑자기 나랑 같은 편이 된다. "적은 적은 나랑 같은 편이다"라는 공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의식이나 정치성으로 뭉친 조직은 전제에 '동질성'을 강하게 띄어야 하고 띌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동질성이 그 조직의 잘못까지도 감쌀 수는 없다.

 

한나라당 원희룡의원이 한나라를 비판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원의원이 한나라를 비판하면 사람들은 왜 그 사람이 그 조직에 들어가 있는가를 의아하게 생각한다. "열린 우리당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라는 비난까지 한다. 원의원이 커다른 정치적원리를 한나라와 같이하며, 사학법 반대투쟁등의 개별적 사안에 대해 반대한다는 인식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비판은 다양성을 띄며, 누구나 비판할 수 있고 누구나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고,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여기에 "우리끼리" 혹은 "우리는 같은 과인데"라는 전제가 깔리면 잘못된 것도 옳게 평하고, 옳은 것도 잘못 평하게 된다.

 

세상은 이분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적'과 '내 편'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 3자도 있고 제 4자도 있는 것이다.

 

여성직원의 차접대에 대해 글을 썼다고해서 나를 갑자기 성전환수술시킨 사람들의 댓글을 보며..

-아해소리-

728x90
반응형
반응형

 1년전에 학교사무원들의 차접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요지는 학교 사무원 (특히 여성)분들이 담당업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학교에 손님이 오거나, 학내 행사때 커피 등 차접대를 관행적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학생들에게 '도덕'적인 부분을 가르치는 선생들조차도 이러한 관행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거의 안한다는 것이였다. '당연히' 학교 사무직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을 쓰고 나서 반응은 잠깐동안이나마 대단했다. 당사자들인 사무원들은 그런 관행은 완전히 폐지되어야된다며 흥분했고, 많은 사람들도 "자판기 갖다놓고 쓰면되지 꼭 여직원이 타와야 하나"등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일부는 "요즘 직장 갖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정도 가지고 투덜대냐" "그럼 나이 많은 교장선생님이 커피 나를까" 등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학교 사무원으로 있는 후배나, 선생님으로 있는 후배들을 대하면서 모두 1년전의 상황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사무원 업무분장에 '내빈 접대'라는 항목이 완전히 사라졌는지, 또 인권위측에서 (당시에는 사례가 없다며 조치해줄 수 없다고 응답) 1년 사이 교육청 등에 어떠한 지시를 내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후배들과 사이버상의 친구들과의 이야기속에서 여전히 행사때 (극히 소수일지 아니면 다수일지 몰라도) 여 사무원들은 '차'를 나르고, 선생님이란 직업을 가진 분들도 (직접 시키지는 않더라도) 그 부분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않고 생활을 해가고 있었다.

 

'차'를 접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개인적 친밀감이나 '조직'이 모두 '동질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무난히 이뤄질 수 있다. 이분화된 조직의 성질속에서 한쪽은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접대'하고 '준비'하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기반으로 '대화'하고 논의를 한다면 그건 분명 부당한 것이다.

 

간혹 TV속에서 정규직 직원이 계약직 직원에게 "커피 부탁해요"라는 대사가 나왔을 때 어이가 없을때가 많았다. 그 방송을 보는 사람들중에 이제 막 회사에 취업하는 이도 있을테고, 그와 유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그런데 방송전파를 통해 그것을 일반화시키면 어쩌라는 것인지.

 

같은 부탁이라도 상황을 봐가며 하고, 상대를 봐가며 해야 한다. 학교든 회사든 여직원들이 차를 접대하러 들어가지는 않았을것이며, 회사 차원에서 그것때문에 뽑지는 않았을것다. (만일 그런 의도로 뽑았다면 그 회사는 뭔가 큰 문제가 있거나 조직이 언제가는 붕괴할꺼다)

 

작년 그 글을 쓰면서 '차 접대'의 문제는 이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 사람의 '급'을 규정짓는 기준을 이런 것으로부터 하나하나 만들고 인지시키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때문에 어떻게보면 '차 접대' 등의 소소한(?) 문제부터 해결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뭐든 부당한 사례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행하게 만드는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 사람과 사람이 같이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아해소리-

728x90
반응형
반응형

자신의 책이 조금이라도 더 쉽게 쓰여졌음을 은연중에 내보이는 방법중에 하나가 책명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카페' '산책' '하룻밤에' 등등.. 이 책 역시 그러한 의도일 것이지만, 동시에 그 의도에 가장 잘 부합하게 글을 썼다. 저자 황주홍교수는 가볍게 그러나 나름대로 상세하게 이 책을 써나가고 있다.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6명의 미래학자들과 그들의 주장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황교수의 간단간단한 코멘트가 연결되어 있다. 마치 강의를 하는 것처럼..황교수가 소개하는 학자들은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앨빈 토플러, 새뮤얼 헌팅턴,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비롯해 경영학도들에게는 친숙한 피터 드러커 그리고 다니엘 벨, 폴 케네디가 그 사람들이다. 설사 이들을 몰라도, '제 3의 물결' '문명의 충돌' '단절의 시대' '이데올로기의 종언' '역사의 종언' '강대국의 흥망'등의 책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 책들의 저자들이다.

 

미래라는 것이 학문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과거 점술 등을 통해서도 미래를 점쳤는데 '흐름'을 통한 점쟁이가 되는 것 역시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닌 듯 싶다. 이들이 말한 미래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흐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일반화되어 있기에 우리가 못 느끼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불확실하기에 불안하고 동시에 희망적이며 투자할 가치가 있는 미래에 대해 이들은 '단정적'으로 확신하며 말한다.

 

사실 이 책은 사기치기 용이한 내용들로 차있다. 어찌면보면 '대학생이 읽어야 하는 필독서 0권' 등에 자주 등장하는 저 위의 책들을 사실 제대로 읽어본 사람들은 드물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데 어디서 줏어들은 내용들도 읽은 양 - 혹은 너무나 많이 저 책들에 대해 들어서 스스로 착각할런지도 -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런 이들을 위해서는 이 책은 더할 나위 없는 '사기서'다. ^^. 하지만 동시에 친절한 설명서이기도 할 것이다. 저들의 책들을 모두 읽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미래적 감각'을 지닌 이들에게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후쿠야마의 트러스트를 읽을 때, 지리하다는 느낌만 받았을 뿐 이것이 왜 필독서로 되었고, 과거 내 대학때 어느 교수의 침튀기는 극찬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뻔한 이야기를 지리한 설명로 늘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역사의 종언이후 올라간 후쿠야마의 이름에 그냥 편승되어 나온 책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결론적으로 황교수의 '미래학 산책'을 한번쯤은 흟어볼 만한 책이다. 적어도 졸만큼 지루하거하지는 않다. 도리어 옆에 필기도구를 꼭 지참하고 봐야할 책 중에 하나다. - 단 출판사가 마음에 안 들었다. 조선일보사.....사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서점에서 그냥 보기에 적절하다. 아니면 빌리거나..^^;;)

-아해소리-

728x90
반응형
반응형

 

과거에도 그랬지만 이번 마호메트 만평 사건은 어떻게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국제문제에 대해 둔감한지 새삼 느끼게 해줬다.

 

'마호메트 만평' 사건은 문명간 충돌로 유럽과 중동, 미국 등은 '제 3차 대전'으로 확산될 수 있는 가장 가능성있는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다. 실제 세계인구의 3분의 1이 믿는 종교를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아래 수치심을 안겨줬으니, 문제가 커질 법도 하다.

 

언론의 자유는 뭐든 맘대로 써도 된다는 자유가 아니다. 전체 질서를 유지하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지키고자 하는 공공의 성격을 지녔을때 부여되는 자유다. 유럽 언론들의 입장을 만일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우리나라 언론들이 유럽 언론인들 개개인의 사적인 이야기 - 심지어 그 부모를 욕하더라도 - 아무 말도 못한다는 소리다. 왜냐면? 언론의 자유니까. 하지만, 만일 이렇게 한다면 난리가 날꺼다. 우리나라 언론에 대고 저급이라느니, 쓰레기라느니 욕을 할것이다. (물론 정말로 이런 일은 안 일어날꺼다).

 

하지만 지금 '마호메트 만평'은 이렇게 일어나지 못할 일이 일어난 경우다. 16억 인구의 숭배자를 욕하고 짓밣은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잘못 적용해서 말이다.

 

이제 돌어와보면, 이런 엄청난 문제에 대해 우리나라 국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그전에 이러한 사건을 국민들에게 알려주는 우리 언론들은 어떨까.

 

각 언론사사이트를 비롯 포털의 뉴스사이트의 며칠간 메인을 보면 이 뉴스를 주요사건으로 제대로 처리한 곳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내가 놓쳤는지는 몰라도, 그나마 많이 본 기사 등에 걸린 내용은 알카에다가 만평 작가들에게 100만달러의 현상금을 내건 내용이나 어제인가 파키스탄 내 우리 기업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정도다.

 

그리고는 거의 안쪽에서 '국제'를 눌러 밑으로 조금 보다보면 나오게 된다. 사실 국제부분 뉴스를 다룰때는 우리 언론들은 크게 세가지 정도에서 빙빙돈다. (물론 간혹 이탈도 하지만).

 

첫째는 미국이야기다. 미국의 흐름이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에 대해 이견은 없지만, 다른 국제문제와의 비중을 따졌을때도 너무 과민하게 반응함은 물론 세세하게 파고 들어간다. 미국내 처음 들어보는 연구소에서 어떤 발표를 하게되면 그게 마치 상식이 되는야 보도한다. 그러다보니 어느때는 커피가 건강에 좋다가 어느때는 독약으로 변하고 만다. (과하면 뭐든 안좋다는 우리 선인들의 말씀대로만 하면 이런 연구는 필요도 없다.)

 

두번째는 토픽성 이야기다. 최근만 해도 베트남에서 33년간 한번도 안잔 농부의 이야기라든가 나이 먹은 유럽인이 태국에서 10대 소녀들을 데리고 살았다든가 하는 흥미나 자극성 이야기들로만 판이 친다. 다소 어이없는 것은 대부분 동남아나 제3국가가 이런 류의 이야기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우리와 정치 경제적 이슈로 첨예하게 대립될때이다. 물론 이런 때야 당연히 보도가 되야 하지만, 평소에 이름도 몰랐던 어느 한 일본 정치인의 망언을 보도하면서 그 사람이 어느정도 위치의 중요한 사람인지 지면소모를 해가며 이야기를 해대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마치 국민을 흥분시키려는 목적만이 존재하는 듯 싶다. 즉 오랫동안 국제적 흐름을 제시하다가 우리나라가 어떻게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는지 꾸준히 제시해주기보다는 냄비근성처럼 확 한번 타오르다가 다시 식을때쯤이면 다시 미국이야기나 토픽성이야기로 끌고가는 패턴을 보인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 국민들도 국제문제에 대해서 둔감해질 수 밖에 없다고 난 생각한다. 16억의 인구가 분노하고 다시 몇 억의 인구가 이에 대치상태로 있어도, 우리 국민에게는 별개의 문제로만 인식한다. 대한민국내 10여만명으로 추정되는 무슬림들만 흥분하고 있을 뿐이다. 하긴 언론사 기자들조차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면, "자 이 그림이 그 그림이요"라며 마호메트 만평사진을 그대로 신문 혹은 인터넷에 게시해 내보냈다가 몇몇 무슬림들의 '항의성 요청'에 의해 삭제 혹은 수정했다.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 고민없이 글로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한번 보여주지 뭐"라고 제시한 것이다.

 

우리 원유의 대부분을 의존하는 중동은 이슬람국가가 많다. 기준도 잣대도 없는 언론의 자유 들먹이다가 엄청 높은 가격의 기름을 사야될지도 모른다. (설마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경전이 헌법을 초월하는 이슬람국가이기에 가능하다) 경제적인 타격까지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뿐만 아니다. 중국과 일본이 대치상태로 가도, 중국이 대만에 시위성 군사훈련을 해도, 세계에 이름도 모르는 질병이 창궐을 해도 우리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도리어 샤라포바가 수영복 모델로 나섰다는 이야기나 할리우드의 어느 한 배우가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는 이야기에 눈길을 돌리리곤 한다.

 

국내 문제도 머리 아픈데, 무슨 국제문제까지 진지하게 살 필요가 있나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과 과거 '집성촌'개념으로 끼리끼리 살다가, 이런 마을 개념이 사라지고 도시화가 되면서 겪었던 혼란스러움과 양극화현성을 떠올린다면, 조금은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해소리-

728x90
반응형
반응형

며칠전 텔레비젼에서 심형래 영화감독님의 파워인터뷰라는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된 이후 영화의 참패로 온 국민의 비난과 질타를 받아온 그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전국민을 반성케 만들었습니다.

그가 '공룡쭈쭈'라는 영화를 만들었을때, 한국에는 전세계적으로 흥행한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가 상륙해 있었습니다. 국민들은 물론 영화인들까지 그의 영화를 쓰레기 같은 영화니 비주류 B급영화니 하며 우롱하고 심지어 그에게인신공격까지 해댔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때 쥬라기 공원을 보면서 왜 우리는 저런 영화를 못만들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수십년간 스크린 쿼터라는 울타리 안에서 돈되는 영화만 만들려고 하고 최고의 스타만을 고집한 영화계는 어차피 따라갈 수 없는 헐리우드식 영화라고 생각하고 현실에 안주할때 심형래 감독은 스스로 미국을 꺾어 보이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공룡 쭈쭈 이후 13년이 흐른 지금 그의 영화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디 워 라는 영화의 흥행여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미국의 영화기술에 대적할 만한 사람은 제가 보기엔 심형래 감독이 국내에서 유일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 한편을 만들었다고 해서 제가 그를 높게 평가하고 영화계가 반성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는 말합니다... 디 워 라는 영화의 완성과 성공보다는 그러한 헐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기술을 보유한 것이 더욱 자랑스럽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수십년간 스크린쿼터로 국가가 보호해 주며 육성했던 영화계가 못했던 일을 심형래 감독이 13년이라는 단기간에 그것도 혼자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심형래 감독은 호랑이를 잡기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미국영화가 호랑이라고 가정한다면 지금껏 국내 영화계는 국가에서 호랑이로부터 보호 해달라고 말만 했을뿐 누구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호랑이를 잡겠다고 생각하는건 어리석은 짓이라며 그런 사람을 바보라고 했습니다. 심형래 감독이 혼자 무기를 만들어 호랑이와 싸울 준비를 하는동안 영화계는 언제까지나 정부가 지켜줄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들만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영화계를 바라보면서 과연 언제까지 스크린 쿼터를 사수해 줘야 할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수십년간 스크린 쿼터로 인해 대미무역에서 손해를 본 것은 국민입니다.

하지만 반사이익을 누린것은 몇몇 스타급 배우들과 메이저 영화사들 뿐입니다. 그러한 극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언제까지 스크린 쿼터를 지켜줘야 하는 것입니까?

영화인 여러분( 영화인 전체가 아닌 몇몇 스타와 메이저 영화사)

이제 그만 국민들 밥그릇에서 숫가락을 빼주세요!!

그리고 1인 시위에 나서는 배우들이여 당신들 스스로 우리 영화가 헐리우드 영화에 못미친다고 말하면서 왜 출연료와 대우는 그들에 버금가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단지 스타라는 이유만으로 국민들에게 동정표를 구하기에는 너무 양심없는 짓 아닐까요??


/출처 : 미디어다음 아고라광장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