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본 첫 영화는 제목은 기억에 남지 않지만, 홍콩영화였다. 부모님 몰래 친구들과 들어간 지정석도 없는 극장 계단에서 난생 처음 본 거대한 화면은 그냥 멍한 기분만을 느끼게 했다. 그 후 다시 찾은 극장에서 본 서편제는 내가 접한 현실이 아닌 화면을 통해서도 내가 눈물을 흘릴 수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무슨 영화배우나 감독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영화를 보는 것이 즐거웠고, 독서실을 간다는 핑계로 역 주변 동시상영극장을 일주일에 한번정도는 꼭 찾아갔다. 지정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편을 봤다고 쫓아내는 것도 아니었기에 같은 영화를 하루에 2~3번씩 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무슨 영화를 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그때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영화를 순수하게 즐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난 영화를 보러가기 껄끄러워졌다.
어느 때부터인가 영화는 기억의 대상이고 분석의 대상으로 변했다. 어느 감독에 대한 영화류를 따져야 하며, 상업주의 영화가 분명 관객을 끌어들이는 재미가 있음에도 왠지 극장 안에 발을 들여놓는 심정은 씁쓸하다. 길거리 가판대에서 집어든 영화관련 잡지도 손에 쥐기조차 무겁다. 한쪽 손에 든 가방보다도 질량적 무게감은 분명 가벼운데도, 심적 무게감은 이를 훨씬 상회한다.
“이 영화 정말 재미있지 않냐? 주인공이 그렇게 연기를 잘할 수가 없더라. 화면 역시 이쁘던데. 어쩜 그리 잘 만들었냐” 영화 관람 후 식사라도 하면서 이런 식의 말을 하면 이제는 무식하다는 말을 듣는다.
“영화의 콘텍스트의 흐름이 뛰어나던데. 주인공의 감정몰입이나 등장인물들의 시선변화는 특히 더 그렇고. 비주얼은 또 어떻고” 이런 식의 어설픈 단어나열이라도 해야 뭔가 아는 듯한 그리고 느끼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냥 그렇게 즐겁게 본 영화보다 왠지 해석하려는 이들의 평이 답답하다.
그러나 이들의 잘못이라기보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 그 영화를 해석한 수많은 일간지, 잡지, TV들의 문제는 아닐까?
“이 영화는 000감독의 작품 세계가 지속적으로 회귀하는 비현실적이고 판타지적인 공간으로 도약해간다.” 어느 잡지에 나온 평론의 일부분이다. 관객들은 이를 따라할 뿐이다.
사실 영화는 그냥 즐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감독들은 그 안에 수많은 메시지를 드러내 보이려 애쓰고, 이를 평론가들은 더 어렵게 해석하고, 관객들은 다시 ‘즐김’의 주체에서 점차 벗어나버린다. 오로지 웃음만을 자아내게 하는 영화는 왠지 모르게 ‘저급’으로 취급되어 무슨 영화잡지에서 보여주듯이 매번 엄지손가락이 아래로 향하게 만든다. 즐기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일까?
<이노센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 후편이다. 조금 오래전 영화다. 전에 같이 본 사람들의 중론은 나오는 대사만 대충 합해도 철학서적 한권은 나온다고 말한다. 영화를 보면 새로운 생각에 대한 몰입이 즐김일 수도 있다. 문제는 다시 그 생각을 풀이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어찌보면 이노센스나 공각기동대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또한 메시지 역시 간단하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매트릭스를 보면서도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지금 실재하는 인간의 모습이 진짜 인간의 모습인가라는 질의가 영화의 중심생각이다.
<공각기동대>의 소좌가 아무도 자신의 뇌를 본 사람이 없다고 말한 것이나 어느 책에서 언급했듯이 사람이 눈을 통해 비추는 감각의 영상이 아닌 실질적인 인간의 모습은 그 누구도 본 적이 없기에 인간은 허구라는 식의 논리를 지리한 책이 아닌 영화로써 접근한 것은 어찌보면 뛰어난 방법이다. 하지만 관객들 대다수는 그것에 그리 광분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보면 1990년대 유행하던 홍콩 느와르에서 주윤발이 천천히 등장하는 장면이나 유덕화가 멋지게 카드를 상대에게 던지는 장면이 더 마음에 와닿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의 영화는 관객에게 계속 알수 없는 질문던지기 놀이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여타 문화도 그러하겠지만 영화는 지금 군림과 무거운 메시지 전달 그리고 사업의 측면에서만 논해지고 있지, 실제 그 영화를 즐기려는 관객의 입장은 돌아보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관객이 영화의 수준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틀에 영화의 수준을 정해놓고, 그에 따라 관객수준까지 결정짓는 시스템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무거운 메시지 전달은 마치 반드시 들어가야 할 옵션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틀 안에서 벗어나거나 어설프게 이 틀에 끼워 맞추려면 곧 사장된다. 물론 살아남는 방법도 있다. 일종의 외부로의 평가. 즉 외국에서 수상하고 들어오면 국내에서의 평가는 180도 달라진다. 이 때부터는 그 영화가 일종의 ‘틀’의 한 부분을 대체하게 된다.
현대에 와서 모든 의식과 개체들이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무슨 독재시대 사상전파의 나팔수도 아니고 즐김의 대상이 되는 문화의 한 부분을 점차 의식화시키는 것은 되짚어봐야 할 문제다. 물론 특정의식의 전파 - 예를 들어 학교문제를 고발한다던가 하는 -를 위한 작업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아예 초반부터 상업주의적임을 표방하고 나선 영화들조차 기존의 사상적 잣대로 분석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싶다. 그리고 이런 작업에 ‘좀’ 안다는, 그리고 ‘제법’ 영화를 봤다는 사람들이 나서서 관객들의 ‘즐김의 권리’를 박탈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글래디에이터>에서 황제의 손가락의 방향에 따라 한 인간의 목숨이 좌지우지되듯 그들이 주는 별 몇 개와 손가락의 방향이 한 영화를 좌지우지하고, 다양한 관객들의 성향을 몇 개의 층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난 과거 중학교때 본 영화를 계속 떠올리려 노력하지만 내용이 기억이 안난다. 1천원짜리 동시상영극장에서 몇 번에 걸쳐 본 영화들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느낌은 분명 살아있다. 대낮에 몇 명 안되는 사람과 같이 보면서, 혹은 주말에 계단에 앉아서 무엇인지 모지만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저려오는 가슴의 느낌은 손에 잡힐 듯 남아있다. 영화를 보면 어느 새 따지게 되는 지금의 나로서는 다시는 느끼기 힘들 듯 싶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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