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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19일 아침 출근길 직장인들로 가득한 용산이 어수선했다. 남일당 빌딩 망루에 철거민들이 올라가 염산을 던진다며 전투경찰들이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무덤덤했다. 시위, 집회가 자주 있는 나라이기에 그려러니 했다. 물론 염산을 던진다는 말에 조심하면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경찰특공대가 남일당 망루를 공격했다.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특공대 한 명이 죽었다. 철거민들은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쳤지만,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그리고 '용산 참사'는 아직도 진행형으로 남아있다.

연극 ‘여기, 사람이 있다’가 무대를 연우무대 소극장으로 옮겨 재 공연된다. 벌써 2년이 훌쩍 지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일이 되어버린 듯한 ‘용산 참사’를 직접적으로 다뤘다.

연극의 배경은 2029년 미래의 대한민국, 서울 뉴타운에 들어선 고급아파트 스카이팰리스 로열층 404동 2501호. ‘아메리칸 인디언 멸망사’를 연구한 인류학 박사 강성현(이화룡)이 20년 만에 귀국한다. 귀국한 지 1주일 되던 밤, 열두 살짜리 아들 소원(김하리)이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못하는 의문의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반장 김지섭(백운철)은 거실에 걸린 인디언의 조각상 ‘크레이지 호스’(성난 말·Crazy Horse)에 주목한다.

강성현의 아내이자 소원의 엄마인 조각가 민지은(최수현)이 귀국해 강성현이 환각제를 통해 어린시절의 인디언 친구 론 울프(김원주)를 불러낸다고 말한다. 이때 소원의 뇌파가 움직이고, 사건이 발생했던 밤 소원이 목격한 이미지가 재생된다. 스카이팰리스가 지어지기 전, 이 동네에 살다가 쫓겨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철거민 이상룡(우돈기)의 유령과 크레이지 호스(김원주)의 유령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왜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까.

연극의 배경은 ‘용산 참사’로부터 20년이 지난 시점의 용산이다. 철거된 그 자리에 세워진 고급아파트는 사람들의 죽음 위에 세워졌다고 연극은 말한다. 연극은 거기에 또 하나의 아픈 역사를 더한다. 바로 미국 기병대로부터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인디언, ‘크레이지 호스’라 불리던 ‘타슈카 위트코’이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기 땅이지만, 더 이상 자기 땅이 될 수 없게 된 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원주민’들이라는 점이다.

연극은 관객들이 사회적으로 어느 자리에 서 있냐에 따라 불편할 수도 있고, 슬프게 공감할 수도 있다. 만일 철거민의 당시 행동에 부당함을 느꼈다면 연극은 불편하다. 내가 철거민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소시민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면 연극은 공감대를 이룬다.


80억 원짜리 스카이팰리스 로열층 계약을 도운 부동산 중계업자가 연극 말미에 다시 등장한다. 그는 북한의 개성 재개발 지역에서 철거민들이 불을 지르고 난리를 일으켰다는 전화를 받고는 “먹고살려고 하는 줄은 알지만 남의 재산에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며 분개한다. 관객들은 중계업자에게 분노의 눈빛을 보내지만, 이내 “한국 사람들은 안 좋은 일은 잘 잊어버리니까 걱정 말라”는 대사는 보는 사람을 민망하게 만든다. 바로 그 무엇인가 잊어버리기 잘하는 '한국 사람'에 나도 들어가 있기 떄문이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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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현이 결국 방송에서 하차됐다. 그리고 자신의 미니홈피를 통해 공식 사과문도 올렸다.

KBS JOY는 24일 오전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20일 방송된 ‘연예매거진 엔터테이너스-성대현의 시크릿 가든’에서 故송지선 아나운서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이 여과 없이 방송되어 물의를 빚은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잘못을 인정했다. 이어 “이에 방송사 측은 23일 비상대책 회의를 통해 해당 프로그램 제작진 전면 교체, 해당 코너 폐지 및 MC 성대현의 하차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앞서 방송사 측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임원회의를 거듭하며 올바른 대안을 찾고 있다”고 조심스러운 입장을 전한 바 있다.

성대현은 지난 20일 송지선 아나운서와 야구선수 임태훈의 스캔들을 희화한 발언으로 뭇매를 맞았다. 고인과 관련한 경솔한 발언에 대한 비난 여론은 거세졌으며 결국 프로그램 제작진 전면교체와 MC 사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과연 이것이 성대현만의 문제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프로그램 제작진은 현재 지상파와 케이블의 예능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고, 그 수준에 맞춰 제작했을 것이다. 시청률을 의식해야 하기에, 그리고 시청률이 잘 나오는 프로그램을 유심히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20일 방송이다.

지상파에서 혹은 케이블에서 여과없이 나오는 개인사와 타인에 대한 희화화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제작진 입장에서는 "타이밍이 안 좋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송 아나운서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 프로그램이, 그 내용이 물밑에서 올라올 수 있었을까. 그 프로그램 자체로만 놓고 과연 시청자들이나 대중들이 욕을 했었을까. 아니다. 즐기고 있었을 사람들도 많다.

이런 지뢰는 어디서든 존재한다. 지상파와 케이블 토크 프로그램의 질 적 수준이 점점 낮아지기 때문이다. 누군가 딴죽을 걸지 않으며, 누군가가 그 말로 인해 어떤 불상사가 생기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말들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위태위태한 폭탄 발언들이 많은 셈이다.

사생활 팔아먹기 식 예능이 바뀌지 않는다면 송 아나운서와 같은 사례는 계속 나올 수 밖에 없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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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엄정화를 안좋게 쓰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을 전하려는 것 뿐이다.

지난해 3월 29일 가수 겸 배우 최진영이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다음 날 스릴러 영화 '베스트셀러' 언론시사회가 열렸다. 최진영과 친했던 엄정화가 출연한 영화다.

엄정화는 전날 '연예가중계-게릴라 데이트' 녹화에 참여키로 했지만 취소해, 언론시사회 참여 여부에 관심이 몰렸었다. 그러나 엄정화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시사회에 참석해 "원래 (최진영이가) VIP시사회에 오기로 했었는데 이런 일이 생겨서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어제는 물론 지금까지도 믿기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오늘 2시에는 엄정화가 출연한 영화 '마마' 언론시사회가 있었다. 그런데 1시 43분 경 송지선 아나운서가 투신, 자살했다. 물론 둘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단지 그냥 엄정화의 출연 영화가 나올 때, 2년 주기로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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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가 이지아의 소 취소에 '부동의서'를 제출했다. 끝까지 가보자는 것이다. 이제는 제대로 법정 소송을 벌이는 것이다.

두 스타가 맞붙을 '위자료 및 재산분할 청구소송'은 대개 1년에서 길게는 2년까지 걸리는 사건이다. 일반인들이 그러할진데, 이들은 이견이 많아 더 지루하게 길어질 것 같다.

이미 알려졌듯 서태지와 이지아가 말하는 '결혼과 이혼'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97년 결혼에는 동의했지만, 실질적인 이혼 시점은 크게 달랐다. 서태지는 2000년 헤어지는 수순을 밟아 2006년 서류정리를 마무리 지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지아는 2006년 이혼을 신청했고 그 효력이 2009년 발효돼 재산 분할 및 위자료 청구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지아의 주장을 보면 서류정리 후에도 뭔가 끈이 닿아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서태지의 주장이 맞다면 은퇴 시기에 함께 살았고 컴백을 하면서 결혼생활이 종료돼 이지아가 재산형성에 기여했다는 주장을 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지아는 "음반 비주얼 작업에도 관여해 왔다"고 주장하며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서태지의 이번 결정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쏟아진다. 서태지가 너무하다는 의견도 있고, 이지아가 큰 실수를 했다는 의견도 있다. 생각해보면 이지아가 서태지 성격을 몇년간 살면서도 잘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역으로 보면 이같은 서태지의 성격 때문에 이지아가 못 살수도 있을 것이다.

실상 서태지로서는 자신의 '신비주의'를 벗겨낸 이지아에 대한 원망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무결점으로 살아온, 신비주의로 살아온 서태지의 최대 오점을 이지아가 남긴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지아의 소송 취소를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서태지로서는 또한번의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시작도 이지아가 마지막도 이지아가 한 것으로 마치 서태지는 놀잇감만 된 꼴로 대중들에게 비춰진 셈이다.

그래서 서태지가 독해진 것 같다. 법정 소송으로 인해 자신이 피해를 입는 것까지도 감수했으니 말이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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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영화의 세계적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와 영화 ‘클로버필드’, 미국 인기드라마 ‘로스트’ 등을 연출한 J.J.에이브럼스의 만남으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영화 ‘슈퍼에이트’(SUPER8)가 20분짜리 영상이 공개됐다.

'슈퍼에이트'의 영상 공개가 기대되는 이유는 하나다. 슈퍼 감독들이 만나서 제작하고 있는데, 정작 그 실체는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스터 한 장과 짤막한 티저 영상만이 공개됐다.

‘슈퍼에이트’는 1979년 미국 제 51구역(외계인을 연구하는 곳으로 알려진 군사 기밀 기지)의 외계인 몬스터 관련 영화를 캠코더로 촬영하던 아이들이 실제로 외계인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번에 공개된 장면은 미확인 물체의 등장 정도다. 영화 제작을 꿈꾸는 아이들은 어설프지만 열정적으로 영화를 찍어내려 기차역에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지나가는 기차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으려던 아이들은 기차와 자동차가 부딪치는 엄청난 사고를 겪는다. 이후 마을 주유소가 의문의 물체에 공격을 당한다. ‘슈퍼에이트’ 스페셜 영상은 이 정도의 짧은 줄거리 안에 SF와 호러, 그리고 스펙터클을 모두 담아냈다. 특히 기차 사고 장면은 여느 블록버스터 영화를 능가했다.

‘슈퍼에이트’는 J.J.에이브럼스가 각본 연출 제작을 맡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에 참여했다. 특히 다코타 패닝의 여동생 엘르 패닝이 출연해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인다.

6월 전세계 개봉이라고 하는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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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팬더2'가 공개됐다. 영화를 국내로 들여온 이들은 전 세계 개봉 전 리뷰를 22일로 엠바고를 제시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난 것은 굳이 22일까지 가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예고편과 온라인에 오픈된 시놉시스, 주요 목소리 연기자 등을 총합하면 어떤 그림이 스크린에 펼쳐질지만 모르지, 사실상 내용은 대략 흐름이 잡힌다. 영상을 글로 직접 표현하기에는 사실 어려운 상황에서, 영화 홍보사의 말하는 '22일 엠바고 리뷰'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영화의 중심 이야기는 주인공 '포'의 출생 비밀이다. 많은 동화책과 만화책, 애니메이션을 섭렵한 이들이라면 1편에서 '포'의 아빠가 팬더가 아니라 거위라는 점에서 "아 누가 버린 팬더 (혹은 어쩔 수 없이 버려야했던 팬더)를 거위가 데려다 키우는구나"라고 이미 눈치는 챘을 것이다. 그러나 2편에서는 이를 디테일하게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귀여운 '베이비 포'의 모습도 공개된다.

1편이 '포'가 용의 전사가 되어 '타이렁'을 제거했지만, 2편에서는 악랄한 악당 '셴 선생'을 상대로 한다. '셴 선생'은 강력한 무기를 앞세우고 위대한 쿵푸 사부를 하나씩 제거한 후 중국을 점령하려 한다. 물론 공작새가 캐릭터로 나오기에, 사실상 '타이렁'보다는 그 무게감은 덜하다. 그러나 교활한 머리와 잔인한 태도는 '타이렁'을 능가한다. 게다가 그는 '포'의 출생의 비밀과 관련이 있다.

3D 효과는 사실상 호불호가 갈릴 듯 싶다. 분명 3D 효과는 있었지만, 관객들이 대부분이 3D에 익숙해 있기에 '쿵푸팬더2'라고 해서 새로울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규모 전투 장면은 확실히 볼만 하다.

동서양 톱스타들의 목소리 연기도 귀를 휘어잡는다. 잭블랙, 더스틴 호프만, 안젤리나 졸리, 성룡, 데이비드 크로스에 악당 '셴 선생'을 연기한 게리 올드만과 '점쟁이 할멈'을 목소리 연기한 양자경까지 별들의 잔치다. 영화를 보다가, 이들의 목소리 연기가 아닌 실제로 모아놓고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또하나의 흥미꺼리. 영화는 재미교포 여인영 감독이 총괄 연출을 맡았다. 미국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한국인이, 여자가 감독을 맡은 것은 '쿵푸팬더2'가 처음이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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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항쟁은 매년 돌아오지만, 사실 모두가 기억하는 일은 아니다. 특히 시대가 변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현 시기에는 더더욱 그렇다. 대학생 때 왠지 광주민주화항쟁을 아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사회에 나오면서 이를 기억하기는 어렵다. 아마 지금도 광주 시민과 일부 대학생만 기억하는 역사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물론 아직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일도 많다. 발포 명령권자가 누군지도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광주민주화항쟁은 항상 무거운 주제였다. 그런데 광주민주화항쟁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연극이 있다. .

현재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상연 중인 연극 ‘푸르른 날에’은 광주민주화항쟁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룬다. 이 날의 사건에 휘말린 어느 남녀의 사랑과 그 후 30여 년에 걸친 인생 역정을 보여 준다.

이야기는 차밭이 보이는 암자에서 수행 중인 승려 ‘여산’(5.18 당시 오민호)이 조카이자 딸인 ‘운화’의 결혼 소식을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의 기억은 30년 전 전남대를 다니던 야학선생 시절로 돌아간다. 당시 민호는 전통찻집 아르바이트생인 윤정혜와 사랑에 빠져 있었고, 정혜의 동생 기준은 민호를 친형처럼 의지하고 있다. 그러다 광주민주화항쟁이 터지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정혜는 민호를 떠나보내고, 도청을 사수하던 민호와 기준은 운명이 갈린다.

살아남기 위해 비겁한 자가 된 민호는 고문 후유증과 함께 정신이상을 겪으며 삶을 포기한다. 결국 민호는 속세의 자신을 버리고 불가에 귀의한다. 민호와 정혜 사이에 생긴 딸 운화를 친형 진호가 거두지만, 세월이 흘러 운화의 결혼에 이르러서는 결국 끊을 수 없는 속세와의 인연에 마주하게 된다.

연극은, 기존에 5,18 광주를 다룬 많은 작품과 달리 무거운 소재를 가볍고 유쾌한 방식으로다룬다. 연출을 맡은 고선웅도 이 연극에 대해 “명랑하게 과장된 통속극”이라고 정의할 정도다.

배우들의 연기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짧은 거리를 다리 벌려 뛰어다니는 모습이나 민호가 과장된 모습으로 시민군을 말리는 장면 그리고 3m 기다란 탁자에 마주 앉아서 찻잔과 청첩장을 내던지듯 건네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연극은 ‘그날의 일’이 남긴 상처가 아직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적절하게 상기시켜낸다. 친구를 팔아 살아남았지만 그 비굴한 삶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는 민호의 모습이나 딸의 결혼식에 과거의 인물들이 나오는 모습은 ‘민호의 오늘’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함을 보여 준다. 서정주의 시와 송창식의 노래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한다.

2011년 연극 무대 위에서의 광주민주화항쟁이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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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위기에서 극적으로 갈등 봉합한 카라가 오는 6월 11일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국내 팬미팅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팬 카페 회원을 우선으로 하며, 그동안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무료로 개최한다고 한다.

 

카라 사태는 지난 1월 19일 일어났다. 당시 박규리를 제외한 멤버들이 DSP에 전속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그러나 반나절 뒤에 구하라가 박규리와 뜻을 같이 하기로 해서 사실상 3인만 DSP와 부딪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태는 지난 4월 28일 해결될 때까지 100일 간 지속됐다.

 

 

논란의 카라, 불안함이 활동 부진으로 이어지나

카라가 야심차게 ‘맘마미아’를 내놓았다. 왜 ‘야심차게’라는 말을 붙였느냐. 니콜과 강지영의 탈퇴, 그리고 새 멤버 영지가 들어온 이후 첫 앨범이기 때문이다. 또 스태프들도 바뀌었고, 대

www.neocross.net

카라

 

일명 '카라 사태'라 불린 이번 일은 비단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카라 멤버들은 사실상 이 분쟁에서 사라졌다. DSP와 카라 부모님과의 분쟁이었고, 이는 곧 가요계 전체로 퍼졌다. 백지영 소속사 측이 카라 3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보도자료를 뿌려 논란이 되었고, 이는 다시 연예제작자협회와 젋은제작자연대의 충돌로 이어졌다. 코어콘텐츠미디어의 김광수 대표가 전면에 나섰고, 이에 오픈월드 장석우 대표가 맞받아쳤다. 중량급 연예계 관계자들의 충돌이 이어진 것이다.

 

팬들 역시 사분오열 됐다. 구하라와 박규리를 옹호하는 팬들과 나머지 3명의 팬들을 옹호하는 팬들로 나뉘어진 것이다. 한 쪽은 DSP를 공격했고, 다른 한 쪽은 나간 멤버들을 배신자 취급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 활동은 이어졌다는 것이다. 뭐 계약상의 문제이긴 했지만 국내 팬들은 이에 분개하기도 했다. 일본 팬 위주로 국내 팬은 무시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팬미팅이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선 효과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연예인들이 기획사와 갈등을 갖는 것은 이미 여러차례 봤고, JYJ처럼 극단적으로 가는 경우가 아니면, 대개 흐지부지 끝났기 때문이다. 카라 역시 분쟁이 있을 당시는 첨예했지만, 이미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그 강도는 덜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는 팬들의 입장이다.

 

과연 이들이 방송에 나와 방긋방긋 웃으면 서로의 친밀감을 자랑할 때, 그 모습을 대중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것도 그 분쟁의 시간이 수년이 아니라, 이제 경우 100일이 갓 지난 상황인데 말이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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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유럽이 제국주의 마수를 아프리카로 뻗아나가던 시절 남아프리카에 살다가 유럽으로 끌려가 인종 전시를 당했던 코이코이 여인인 '사라 바트만'을 다룬 연극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

지난 2003년과 2004년 연출가 이석호에 의해 만들어진 창작 희곡 '사라 바트만'은 한국과 남아공은 물론 모잠비크, 케냐 등 아프리카 3개국 순회공연을 펼쳤었다. 이 공연이 8년 만에 '사라 바트만과 해부학의 탄생'이라는 이름으로 5월에 무대에 오른다. 이 공연은 다시 아프리카 순회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그럼 '사라 바트만'이 누구인가.

지금으로부터 200여년전 남아공의 케이프타운 인근에 사끼 바트만(Saartje Baartman)이라는 흑인여인이 살고 있었다. 이 여인은 엉덩이가 불룩 튀어나온 특이한 신체구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에 주목한 한 영국인 의사 윌리엄 던롭(Willliam Dunlop)은 자신을 따라 유럽에서 순회전시를 하면 돈을 많이 벌 것이라고 유혹한다. 1810년 ‘사끼 바트만’은 스무살의 나이에 이 의사와 함께 대서양을 건넌다.
 
유럽여성들의 신체와 비교해 특이한 둔부를 가진 사끼 바트만은 그 둔부 하나로 당시 제국주의 유럽 인종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게 된다. 이들 학자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신체적 차이에 대한 호기심, 나아가 성적 관음증의 대명사가 된 사끼 바트만은 런던, 파리, 암스텔담 그리고 기타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나체의 몸을 보여주는 인종전시를 당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름도 부르기 쉬운 ‘사라 바트만(Sara Baartman)’으로 바뀌게 된다.

1810년경 사라 바트만의 '이상한 쇼(Freak Show)'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이상한 쇼'는 1400년경 프랑스왕실에서부터 기원한다. 당시 프랑스 왕실은 '다른 것'은 반드시 왕실로 가져와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동물은 물론 사람도 그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 왕실의 이러한 취미는 대중들에게 전달되어 '이상한 쇼'로 발전한다.

사라가 처음 전시되었던 런던 윌슨스뮤지컬 근처는 이미 이런 쇼가 번성하던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신체부위가 크거나 작은, 그리고 불구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밥법이를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형의 동물들에게 여자 옷을 입혀 전시하고 돈을 벌기도 했다. 현재도 이 곳에서는 포르노쇼 극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 코이코이(Khoi Khoi)부족이었던 사라에게 붙여진 애칭은 '호텐토트(유인원)의 비너스'. 영국의 식민지 개척으로 당시 많은 서구인들이 인류학자, 여행가의 이름으로 빈번히 남아프리카를 왕래했다. 이들은 유목민이었던 코이코이 부족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가장 '우수한 원숭이(유인원)'쯤으로 생각하고 이들의 생식기관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신체의 특정부위를 과장되게 묘사해 서구에 퍼뜨림으로써 사람들에게 성적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했다.

엄청나게 큰 가슴과 툭 튀어나온 엉덩이를 코이코이 부족의 특징으로 묘사한 그림은 그것을 말해준다. 사라의 나체가 영국과 프랑스에서 대성공을 거둔 것은 이 때쯤. 실제로는 사라의 신체가 서구인들에 비해 기형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관련 사가들의 증언이다.
 
한편 영국 재판부는 사라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사라는 돌아가서 노예가 되거나 질병에 대한 면역 상실로 죽게될 것을 두려워해 그것을 거부했다. 사라는 사리를 분간할 줄 아는 영리한 여자였다. 그러나 무려 5년동안 비인간적으로 이어지는 노역과 수모를 이기지 못한 사라 바트만은 1815년 1월1일 새벽, 자신의 스물여섯번째 생일을 눈앞에 두고 끝내 프랑스 파리에서 숨을 거둔다. 먼 이역 땅에서 변변히 돌보아주는 사람 하나없는 애절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비운은 숨이 멎은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  

그녀의 시신은 당시 프랑스의 유명한 해부학자인 조르쥬 쿠비에(George Cuvier)에게 양도된다. 조르쥬 쿠비에는 그녀의 시신에서 생식기와 뇌를 분리해낸 다음 '인간이 멈추고 동물이 시작되는 지점'을 찾아내는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후 사라 바트만의 유해는 뇌와 생식기가 분리된채 박제되어 장장 187년 동안 프랑스의 인류학박물관에 소장 전시된다.

연극 사라 바트만의 공식 블로그의 주소는 http://blog.naver.com/jhimine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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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일로 만나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공연장에서가 아닌 자리에서 인순이라는 사람을 몇 번 봤다. 무대나 무대 밖에서나 그녀는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다. 에너지가 눈에 보였고, 그녀는 그것을 사람들과 공유하려 했다. 5월 7일과 8일 인순이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 전국 투어의 일환이다. 2시간이 넘게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다.

"어버이날에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있어줘서 고맙다"라고 인사를 할 정도로 팬을 챙기는 인순이는 50대 중반이다. 그러나 안무팀에 전혀 밀리지 않는 관록을 자랑한다. 언제가 그녀는 말했다.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그녀에게 삶은 의외로 가시밭길이었다. 바로 그녀에 대한 편견때문이었다. 혼혈은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더더욱 그렇다. 아직도 그녀에 대해 50대 이상의 장년층은 아직혼 혼혈이 아닌 '튀기'라 부를 정도다. 이는 비단 대중들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시선이었다.

18년 전인 1993년 한 언론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혼혈여가수 인순이 씨가 오는 13일 경기도 송탄 미 공군기지 혼혈아센터에서 2만6000달러(약 2000만원)를 혼혈인협회에 기증할 예정이어서 눈길"이라고 적혔다. 지금 같으면 여러 시민단체는 물론 네티즌들에게도 난리가 날 말이다. 가수면 가수지, 혼혈 여가수가 무엇이냐고. 그러나 그때는 그랬다. 그리고 그 길을 인순이는 고스란히 받았다.

인순이가 걸어온 길을 조금 살펴보자. 이는 모 기사의 인용이다.

인순이는 18세 때 먹고 살기 위해 노래를 시작했다. 1978년 ‘희자매’로 데뷔한 인순이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녀들이 가지 않은 군부대가 없었다. ‘희자매’외에도 ‘숙자매’ ‘바니걸스’ ‘펄 시스터즈’ 등이 대중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이런 분위기는 80년대 초반 대학가요제 등의 인기로 달라졌다. 방송에서 ‘자매’들은 사라졌다. 이들의 터전은 행사장이나 밤무대로 바뀌었다. 해체한 팀도 많았지만 인순이는 꾸준히 노래를 불렀다. 80년대 중반 솔로로 나선 인순이는 신중현의 명곡 ‘떠나야 할 그 사람’과 ‘밤이면 밤마다’를 불러 반짝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혼혈가수’였다. 방송이나 신문뿐만 아니라 그를 소개하는 모든 글은 ‘혼혈가수’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혼혈’에 대한 아픔은 고스란히 딸에게도 이어졌다. 1994년 박경배 경희대 대학원 교수와 결혼한 인순이는 미국에서 딸을 낳았다. 혼혈이라는 우리 사회의 차별이 걱정되어 미국 시민권이라는 안전장치를 마련해주고 싶어서였다.

시대가 바뀌면서 어린 가수들에게 밀려 점점 묻히는 듯 했던 인순이는 1993년 KBS 1TV에 음악프로그램 ‘열린 음악회’가 생기면서 다시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립싱크 위주로 점점 변질되어가던 음악 순위 프로그램에 지쳐있던 시청자들은 ‘진짜’ 노래하는 가수들이 나오고 다양한 음악들이 선보이는 ‘열린 음악회’에 빠졌다. 그리고 그곳을 인순이가 평정했다.

‘밤이면 밤마다’ 등으로 객석을 휘어잡던 인순이는 어느새 프로그램 마지막을 장식하는 메인 가수로 자리 잡았다. 아무리 인기 있던 어린 가수들이 나와도 인순이가 등장하는 날에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인순이가 2004년 대형 사고를 쳤다. 2004년 6월 초 래퍼 조PD와 함께 부른 곡 ‘친구여’로 MBC 음악캠프에서 1위를 차지했다. 젊은 층이 인순이에게 열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인순이는 당시 젊은 가수들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배꼽 티와 핫팬츠를 입기 위해 등산을 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순이가 지금 가장 행복한 이유는 그의 노래가 히트해서도, 그의 인지도가 높아서도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냈던 편견이 어느새 지워지고, 그를 그냥 인순이로 봐줘서일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후배들의 사랑도 받고 대중들의 사랑도 받는다.

최근 인순이가 '나는 가수다' 제의를 거절했다고 들었다. 한쪽에서는 잘했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아쉽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만일 인순이가 '나는 가수다'에 나왔다면, 임재범과 더불어 후배 가수들 다 죽이는 꼴이 될 듯 싶었다. 그 끼와 가창력 그리고 여유는 단연 으뜸이니 말이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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