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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이야기를 하다보면 "아직도 1년 반이나 남았다니"라며 한숨을 쉰다. 좌충우돌 방향도 방향도 없는 MB정부가 신뢰를 잃은지 오래긴하지만, 최근 일련의 사태는 정점을 찍는 것 같다.

얼마전 전주국제영화제에 갔다가 온 도시에 내걸린 'LH 본사 이전'에 대한 깃발을 봤다. 과거에 여의도 광장이나 시청 앞에서 집회가 있었을 때, 펄럭이던 깃발을 보던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심했다. 그런데 결국 LH 본사는 진주로 가면서 전주의 민심은 폭발했다.

LH 본사 이전은 경남과 전북의 갈등을 부추겼고, 동남권 신공항은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거기다가 이번에 과학벨트가 사실상 대전 대덕연구지로 결정되었다는 소문은 충청과 대구경북, 그리고 광주전남의 지역간 갈등을 남기게 될 상황이다.

물론 세 사업의 성격은 다르다. 동남권 신공항 사업과 LG본사 이전 사업은 지역균형발전을 고려한 것이다. 때문에 지역간 갈등의 예고되었다. 정부는 그 갈등 조절을 실패한 것이다. 그런데 전형적인 국책사업인 과학벨트마저 지역 갈등을 초래한 것은 MB정부의 무능력함은 대놓고 보여준 셈이다.

여권과 한나라당 소속 지자체장들마저 정부에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다. 1년 반이나 남았는데, MB 정부의 레임덕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 자처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꼴을 1년 반이나 봐야한다는 것이 무섭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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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항쟁은 매년 돌아오지만, 사실 모두가 기억하는 일은 아니다. 특히 시대가 변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현 시기에는 더더욱 그렇다. 대학생 때 왠지 광주민주화항쟁을 아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사회에 나오면서 이를 기억하기는 어렵다. 아마 지금도 광주 시민과 일부 대학생만 기억하는 역사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물론 아직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일도 많다. 발포 명령권자가 누군지도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광주민주화항쟁은 항상 무거운 주제였다. 그런데 광주민주화항쟁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연극이 있다. .

현재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상연 중인 연극 ‘푸르른 날에’은 광주민주화항쟁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룬다. 이 날의 사건에 휘말린 어느 남녀의 사랑과 그 후 30여 년에 걸친 인생 역정을 보여 준다.

이야기는 차밭이 보이는 암자에서 수행 중인 승려 ‘여산’(5.18 당시 오민호)이 조카이자 딸인 ‘운화’의 결혼 소식을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의 기억은 30년 전 전남대를 다니던 야학선생 시절로 돌아간다. 당시 민호는 전통찻집 아르바이트생인 윤정혜와 사랑에 빠져 있었고, 정혜의 동생 기준은 민호를 친형처럼 의지하고 있다. 그러다 광주민주화항쟁이 터지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정혜는 민호를 떠나보내고, 도청을 사수하던 민호와 기준은 운명이 갈린다.

살아남기 위해 비겁한 자가 된 민호는 고문 후유증과 함께 정신이상을 겪으며 삶을 포기한다. 결국 민호는 속세의 자신을 버리고 불가에 귀의한다. 민호와 정혜 사이에 생긴 딸 운화를 친형 진호가 거두지만, 세월이 흘러 운화의 결혼에 이르러서는 결국 끊을 수 없는 속세와의 인연에 마주하게 된다.

연극은, 기존에 5,18 광주를 다룬 많은 작품과 달리 무거운 소재를 가볍고 유쾌한 방식으로다룬다. 연출을 맡은 고선웅도 이 연극에 대해 “명랑하게 과장된 통속극”이라고 정의할 정도다.

배우들의 연기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짧은 거리를 다리 벌려 뛰어다니는 모습이나 민호가 과장된 모습으로 시민군을 말리는 장면 그리고 3m 기다란 탁자에 마주 앉아서 찻잔과 청첩장을 내던지듯 건네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연극은 ‘그날의 일’이 남긴 상처가 아직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적절하게 상기시켜낸다. 친구를 팔아 살아남았지만 그 비굴한 삶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는 민호의 모습이나 딸의 결혼식에 과거의 인물들이 나오는 모습은 ‘민호의 오늘’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함을 보여 준다. 서정주의 시와 송창식의 노래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한다.

2011년 연극 무대 위에서의 광주민주화항쟁이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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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이 2억 원에 육박하는 병원비를 두고 고민에 휩싸였다고 한다. 아주대 병원에 따르면 현재 석 선장의 병원비는 1억 7500만원에 달한다. 이를 아주대 병원이 삼호해운 측에 중간 정산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삼호해운 측은 병원비를 낼 수 없는 형편이라고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삼호해운은 지난달 21일 부산지법에 법정관리를 신청해 '재산보전처분명령'과 '포괄적금지명령'을 받아 법원의 허가 없이 채무변제나 자산처분을 할 수 없다. 삼호해운은 석 선장 치료비를 보험 처리하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보험사가 규정에 따라 병원비를 먼저 지급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석선장은 현재 두 차례 더 수술을 받아야 하기에 재활치료까지 고려하면 최소 두 달은 더 입원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병원비는 2억 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현 상황에서 강제 퇴원 이야기까지 나왔다. 물론 아주대는 이에 대해 부인했다. 그러면서 석 선장 개인이 병원비를 납부하는 것이 아닌, 석 선장이 가입한 선원보험에서 처리할 문제라며 여론의 포화를 교묘하게 피해가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상황을 보니 아주대와 현 MB정권이 한심해 보였다. 우선 아주대는 그동안 석 선장을 치료하면서 누른 광고 효과가 막대하다. 아주대 병원이로 이송된 1월 29일부터 의식을 완전히 회복한 2월 28일까지 한달간 신문 방송 인터넷 매체에 거의 매일 병원이 노출되다시피했다. 병원 홍보팀장도 "1000억원을 들여도 이 정도의 홍보효과를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광고기획사 오리콤이 대강 산정한 내용에도 약 1290억원의 광고비로 환산됐다.

그런데 2억 원의 병원비 때문에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2억 원이 적다는 것도 아니고, 병원비를 무조건 내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정도 광고효과를 누린 아주대가 석 선장의 완치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삼호해운의 사정까지 봐주지 못할 정도인가이다.

현 정권도 마찬가지다. MB는 지난 3월 5일 아주대를 방문해 "석 선장이 빨리 걸어나와야 이번 작전도 끝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선물한 예복을 퇴원 후 입고 청와대를 방문해달라고 말했다. MB 말대로 하면 아직도 아덴만 작전은 끝나지 않은 상황이고, 거기에 아주대가 초를 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어렵게 살려놓은 것은 인정하자. 그리고 아주대 병원이 자선봉사 기업이 아님도 인정하자. 그러나 적어도 인술을 펼치는 곳이라면, 상업성과는 거리를 어느 정도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가 그들을 비롯해 정권까지도 '영웅'으로 추앙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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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위기에서 극적으로 갈등 봉합한 카라가 오는 6월 11일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국내 팬미팅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팬 카페 회원을 우선으로 하며, 그동안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무료로 개최한다고 한다.

 

카라 사태는 지난 1월 19일 일어났다. 당시 박규리를 제외한 멤버들이 DSP에 전속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그러나 반나절 뒤에 구하라가 박규리와 뜻을 같이 하기로 해서 사실상 3인만 DSP와 부딪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태는 지난 4월 28일 해결될 때까지 100일 간 지속됐다.

 

 

논란의 카라, 불안함이 활동 부진으로 이어지나

카라가 야심차게 ‘맘마미아’를 내놓았다. 왜 ‘야심차게’라는 말을 붙였느냐. 니콜과 강지영의 탈퇴, 그리고 새 멤버 영지가 들어온 이후 첫 앨범이기 때문이다. 또 스태프들도 바뀌었고, 대

www.neocross.net

카라

 

일명 '카라 사태'라 불린 이번 일은 비단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카라 멤버들은 사실상 이 분쟁에서 사라졌다. DSP와 카라 부모님과의 분쟁이었고, 이는 곧 가요계 전체로 퍼졌다. 백지영 소속사 측이 카라 3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보도자료를 뿌려 논란이 되었고, 이는 다시 연예제작자협회와 젋은제작자연대의 충돌로 이어졌다. 코어콘텐츠미디어의 김광수 대표가 전면에 나섰고, 이에 오픈월드 장석우 대표가 맞받아쳤다. 중량급 연예계 관계자들의 충돌이 이어진 것이다.

 

팬들 역시 사분오열 됐다. 구하라와 박규리를 옹호하는 팬들과 나머지 3명의 팬들을 옹호하는 팬들로 나뉘어진 것이다. 한 쪽은 DSP를 공격했고, 다른 한 쪽은 나간 멤버들을 배신자 취급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 활동은 이어졌다는 것이다. 뭐 계약상의 문제이긴 했지만 국내 팬들은 이에 분개하기도 했다. 일본 팬 위주로 국내 팬은 무시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팬미팅이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선 효과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연예인들이 기획사와 갈등을 갖는 것은 이미 여러차례 봤고, JYJ처럼 극단적으로 가는 경우가 아니면, 대개 흐지부지 끝났기 때문이다. 카라 역시 분쟁이 있을 당시는 첨예했지만, 이미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그 강도는 덜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는 팬들의 입장이다.

 

과연 이들이 방송에 나와 방긋방긋 웃으면 서로의 친밀감을 자랑할 때, 그 모습을 대중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것도 그 분쟁의 시간이 수년이 아니라, 이제 경우 100일이 갓 지난 상황인데 말이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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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유럽이 제국주의 마수를 아프리카로 뻗아나가던 시절 남아프리카에 살다가 유럽으로 끌려가 인종 전시를 당했던 코이코이 여인인 '사라 바트만'을 다룬 연극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

지난 2003년과 2004년 연출가 이석호에 의해 만들어진 창작 희곡 '사라 바트만'은 한국과 남아공은 물론 모잠비크, 케냐 등 아프리카 3개국 순회공연을 펼쳤었다. 이 공연이 8년 만에 '사라 바트만과 해부학의 탄생'이라는 이름으로 5월에 무대에 오른다. 이 공연은 다시 아프리카 순회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그럼 '사라 바트만'이 누구인가.

지금으로부터 200여년전 남아공의 케이프타운 인근에 사끼 바트만(Saartje Baartman)이라는 흑인여인이 살고 있었다. 이 여인은 엉덩이가 불룩 튀어나온 특이한 신체구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에 주목한 한 영국인 의사 윌리엄 던롭(Willliam Dunlop)은 자신을 따라 유럽에서 순회전시를 하면 돈을 많이 벌 것이라고 유혹한다. 1810년 ‘사끼 바트만’은 스무살의 나이에 이 의사와 함께 대서양을 건넌다.
 
유럽여성들의 신체와 비교해 특이한 둔부를 가진 사끼 바트만은 그 둔부 하나로 당시 제국주의 유럽 인종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게 된다. 이들 학자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신체적 차이에 대한 호기심, 나아가 성적 관음증의 대명사가 된 사끼 바트만은 런던, 파리, 암스텔담 그리고 기타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나체의 몸을 보여주는 인종전시를 당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름도 부르기 쉬운 ‘사라 바트만(Sara Baartman)’으로 바뀌게 된다.

1810년경 사라 바트만의 '이상한 쇼(Freak Show)'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이상한 쇼'는 1400년경 프랑스왕실에서부터 기원한다. 당시 프랑스 왕실은 '다른 것'은 반드시 왕실로 가져와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동물은 물론 사람도 그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 왕실의 이러한 취미는 대중들에게 전달되어 '이상한 쇼'로 발전한다.

사라가 처음 전시되었던 런던 윌슨스뮤지컬 근처는 이미 이런 쇼가 번성하던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신체부위가 크거나 작은, 그리고 불구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밥법이를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형의 동물들에게 여자 옷을 입혀 전시하고 돈을 벌기도 했다. 현재도 이 곳에서는 포르노쇼 극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 코이코이(Khoi Khoi)부족이었던 사라에게 붙여진 애칭은 '호텐토트(유인원)의 비너스'. 영국의 식민지 개척으로 당시 많은 서구인들이 인류학자, 여행가의 이름으로 빈번히 남아프리카를 왕래했다. 이들은 유목민이었던 코이코이 부족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가장 '우수한 원숭이(유인원)'쯤으로 생각하고 이들의 생식기관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신체의 특정부위를 과장되게 묘사해 서구에 퍼뜨림으로써 사람들에게 성적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했다.

엄청나게 큰 가슴과 툭 튀어나온 엉덩이를 코이코이 부족의 특징으로 묘사한 그림은 그것을 말해준다. 사라의 나체가 영국과 프랑스에서 대성공을 거둔 것은 이 때쯤. 실제로는 사라의 신체가 서구인들에 비해 기형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관련 사가들의 증언이다.
 
한편 영국 재판부는 사라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사라는 돌아가서 노예가 되거나 질병에 대한 면역 상실로 죽게될 것을 두려워해 그것을 거부했다. 사라는 사리를 분간할 줄 아는 영리한 여자였다. 그러나 무려 5년동안 비인간적으로 이어지는 노역과 수모를 이기지 못한 사라 바트만은 1815년 1월1일 새벽, 자신의 스물여섯번째 생일을 눈앞에 두고 끝내 프랑스 파리에서 숨을 거둔다. 먼 이역 땅에서 변변히 돌보아주는 사람 하나없는 애절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비운은 숨이 멎은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  

그녀의 시신은 당시 프랑스의 유명한 해부학자인 조르쥬 쿠비에(George Cuvier)에게 양도된다. 조르쥬 쿠비에는 그녀의 시신에서 생식기와 뇌를 분리해낸 다음 '인간이 멈추고 동물이 시작되는 지점'을 찾아내는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후 사라 바트만의 유해는 뇌와 생식기가 분리된채 박제되어 장장 187년 동안 프랑스의 인류학박물관에 소장 전시된다.

연극 사라 바트만의 공식 블로그의 주소는 http://blog.naver.com/jhi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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