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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자 유괴 시도 전국적 발생…다시 살펴보는 1975년 부산 어린이 연쇄 유괴 및 살인 사건

'안양 초등생 유괴·살인 사건'…세상이 무섭다.지난 11일 수원 호매실동 호매실 나들목 인근 야산에서 이혜진 양의 시신이 발견된 것에 이어 오늘은 시흥시 군자천에서 우예슬 양의 시신일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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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주 장혁 주연의 영화 보통사람은 대한민국 최초의 연쇄살인범을 다룬다. 물론 이 영화의 초점은 국가가 국민을 어떻게 우롱하고, 사건을 조작하는지를 보여준 영화지만, 그 핵심에는 연쇄살인사건이 존재한다. 이 사건의 모티브가 된 것이 1975년 김대두 연쇄살인사건이다. 영화도 유신 시절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 사건도 역시 유신이 배경이다. 한국 최초의 연쇄 살인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무엇일까.

 

김대두 연쇄 살인 사건

1. 사건 개요

 

김대두는 1975813일부터 107일까지 55일 동안 전라남도와 경기도, 서울 등지에서 9차례에 걸쳐 17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범이다. 그는 강도, 강간, 일가족 몰살 등 다양한 범죄를 저질렀으며, 피해자들은 노인, 여성,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무차별적이었다.

 

2. 범행 동기 및 특징

 

동기: 김대두는 전과자로서 사회 부적응, 소외감, 그리고 사회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고 진술했다. 그는 내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을 남기고 싶지 않았고, 젖먹이 우는 소리가 귀찮았다고 말했다.

 

대상: 주로 외딴집에 거주하는 노약자나 어린이를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수법: 흉기를 사용해 피해자들을 살해했으며, 완전 범죄를 위해 목격자를 없애는 방식을 택했다. 훔친 금액은 총 26800원에 불과했다.

 

특이사항: 160cm의 왜소한 체격이었으며, 옥중에서 개신교 신자가 되어 수천 명에게 전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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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두 살인 사건

 

3. 검거 및 처벌

 

김대두는 피가 묻은 청바지를 세탁소에 맡겼다가 세탁소 주인의 신고로 검거되었다. 19761228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4. 사건에 대한 의혹 제기

 

일부에서는 김대두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혹을 제기한다. 수사 과정의 문제점: 검거 당일 17건의 범죄를 자백하고 보도자료가 배포된 점, 몽타주가 검거 전에 미리 설계된 것이 아니냐는 점 등이 의심을 받고 있다. 또 현장 검증 당시 껌을 씹는 모습이 부자연스럽다는 지적이 있다. 여기에 김대두가 보낸 편지의 필체가 모두 다르고, 중학교를 중퇴한 사람이 쓰기에는 어려운 내용이 담겨 있다는 의혹이 있다.

 

영화 보통사람

5. 김대두 사건의 영향

 

한국 연쇄 살인 범죄사

 

김대두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연쇄 살인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이후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 이후, 유사한 유형의 연쇄 살인 사건들이 발생하며 사회적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또 피해자와 특별한 연관성이 없었고, 무작위로 정해 잔혹한 범죄를 저질러 오늘날 묻지마 범죄의 시초격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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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수사 및 프로파일링의 발전

 

김대두 사건은 초기 연쇄 살인 사건이었기에 미흡한 점이 많았지만, 이후 과학 수사 기법과 프로파일링 도입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적 인식 변화

 

이 사건은 사회적 소외 계층에 대한 관심과 범죄 예방을 위한 사회 안전망 구축의 중요성을 부각했다. 또한, 전과자에 대한 사회적 냉대가 재범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며, 갱생을 위한 사회적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유사 연쇄살인범죄 재조명

 

김대두 사건 이후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 유사한 연쇄 살인범들의 범죄가 사회적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들 역시 사회에 대한 분노, 경제적 어려움, 사회 부적응 등의 공통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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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초등생 유괴·살인 사건'…세상이 무섭다.

지난 11일 수원 호매실동 호매실 나들목 인근 야산에서 이혜진 양의 시신이 발견된 것에 이어 오늘은 시흥시 군자천에서 우예슬 양의 시신일 일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경찰들 "못해먹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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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국에서 어린이 유괴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서울 관악구와 대구 서구에서는 60대 남성이 초등학생을 유인하려다 검거됐고, 제주 서귀포에서는 30대 남성이 초등학생을 차에 태우려다 체포됐다. 경기 광명에서는 고등학생이 초등학생을 따라가 납치 시도를 한 적도 있다. 사람을 납치하거나 살해하는 것은 당연히 중대범죄지만, 대상이 미성년자일 경우 더더욱 중하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끊이지 않는데, 특히 1975년에 부산에서 발생한 어린이 연쇄 유괴 및 살인 사건은 최근 일을 살펴보면, 다시 돌아봐야 할 일이다. 당시 사건은 지금까지도 미해결 상태다.

 

부산 어린이 유괴

1. 사건 개요

 

첫 번째 사건 : 1975820. 7세 김지은(가명) 양이 핫도그를 사러 나간 후 실종되었고, 821일 용두산 공원에서 손발이 묶인 채 살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시신에는 "범천동 임재은이 대신공원에서 죽었다"라는 글이 사인펜으로 쓰여 있었다.

 

두 번째 사건 : 824일에 발생. 5세 박도훈(가명) 군이 저녁 식사 후 실종되었고, 다음 날 어시장 근처에서 손발이 묶여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도훈 군의 시신에는 "후하하 죽였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2. 범인의 특징 및 단서

 

시그니처 : 범인은 피해자들의 시신에 특정한 메시지를 남기는 "시그니처"를 사용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형태의 범죄 행각이었다.

 

통행금지 : 범행 시간대가 자정 이전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당시 시행되던 통행금지 시간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차량 : 유괴 장소와 시신 발견 장소 간의 거리가 멀어 범인이 차량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7698 : 범인은 경찰에 전화하여 "7698"이라는 숫자를 남겼는데, 이는 임재은(가명) 양의 집 전화번호 뒷자리로 추정된다.

 

부산 어린이 유괴

 

3. 수사 과정

 

탐문 수사 : 경찰은 탐문 수사를 통해 목격자를 찾고, 범천동 일대를 수색하며 "임재은"이라는 인물을 찾으려 노력했다.

 

만화책 수사 : 범인이 남긴 "후하하"라는 표현이 만화책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에 주목하여 만화책을 대량으로 조사하기도 했다.

 

몽타주 : 유일한 생존자인 임재은 양의 증언을 바탕으로 몽타주를 제작하여 배포했지만, 범인을 특정하는 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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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중간중간 '왜'라는 질문을 쉽게 던지지도 않지만, 설사 질문이 스크린밖으로 튀어나왔다 하더라도 생각할 시간이 없다. 감독과 배우들이 제시하는 스토리와 영상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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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임재은 양 유괴 미수 사건

 

818, 9세 임재은(가명) 양이 유괴당했으나, 범인이 목을 조르는 과정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파출소로 피신했다. 범인은 재은 양을 "주인님"이라 부르라고 강요하고 전화번호를 묻는 등 기이한 행동을 보였다. 재은 양은 범인의 인상착의와 특징(오른쪽 코 옆 점 2, 입가 점 1, 노란 재단자 소지)을 상세히 진술하여 몽타주 제작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5. 사회적 영향

 

공포 확산: 사건 이후 부산 지역 사회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으며, 아이들의 외출을 자제하고 유괴 예방 캠페인이 벌어지는 등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6. 미제 사건

 

결국 범인은 검거되지 않았고, 공소시효 만료로 인해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사건 담당 형사는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토로했다.

 

7. 이리역 사건과의 연관성 (미확인)

 

1976, 이리역(현재의 익산역)에서 발생한 아동 유괴 살해 사건의 범인이 부산 연쇄 살인 사건과의 연관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리역 사건의 범인이 영도구 거주자이며 범행 수법 또한 유사했으나,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8. 꼬꼬무 재조명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이 사건을 재조명하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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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암살‧내란죄 선고‧파면…윤석열,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박근혜 상황 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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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비극으로 남아있다. 재일교포 문세광의 총탄에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면서, 사건은 단순한 암살 사건을 넘어 정치적, 외교적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5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현재까지도 명확히 해소되지 않은 의혹과 미스터리가 남아 끊임없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문세광

1. 사건 개요

 

1974815일 오전 1023,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낭독하던 중, 객석에 앉아 있던 문세광이 박정희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문세광의 총탄은 박정희를 빗나갔지만,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육 여사는 즉시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았으나, 같은 날 오후 7시경 사망했다.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조사 결과 위조 여권을 이용해 일본에서 밀입국한 뒤 일본 경찰서에서 탈취한 권총을 범행에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문세광의 배후에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과 북한의 지령이 있었다고 발표했으며, 문세광은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같은 해 12월 사형이 집행됐다.

 

2.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육영수 여사를 쏜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핵심적인 의문은 과연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에 맞아 사망했는지 여부다. 공식 수사 결과는 문세광의 네 번째 총탄이 육 여사의 머리에 명중했다는 것이지만, 현장 검증에 참여했던 경찰 감식계장 이건우는 문세광이 쏜 총알은 육 여사에게 닿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건우는 문세광의 총알은 오발, 연단, 태극기, 천장으로 향했으며, 사라진 한 발의 총알이 육 여사를 맞혔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일부에서는 경호원의 오발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당시 현장에서는 7발의 총성이 울렸는데, 문세광이 4발을 쏘고 경호원이 3발을 쐈다는 것이다. 경호원의 총탄 중 한 발은 엉뚱하게도 합창단 여고생 장봉화 양을 사망하게 했고, 나머지 두 발 중 하나가 육 여사를 맞혔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사격 실험을 통해 육 여사가 경호원의 총에 맞았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서울의 봄' 때문에 '한국 현대 이 영화 보면 된다'로 정리.

영화 '서울븨 봄'을 보면서 영화가 현대사를 어떻게 정리했는지 궁금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흐름대로 보면 현재 국민의힘은 많이 당황스러울 것이다. 국민을 죽이고, 억압하고, 북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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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광

 

총상 위치와 탄도

 

육영수 여사의 총상 위치 또한 의혹을 증폭시키는 요인이다. 문세광은 연단의 왼쪽에서 총을 쐈고, 육 여사는 연단의 오른쪽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총알이 육 여사의 머리 정면이나 오른쪽을 맞혔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외신 보도 등을 보면 육 여사의 머리가 오른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이는 총알이 뒤쪽에서 날아왔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3의 인물에 의한 저격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문세광은 어떻게 삼엄한 경비를 뚫었나?

 

대통령이 참석하는 공식 행사장에는 철저한 경비가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문세광은 비표도 없이, 권총을 소지한 채로 행사장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이는 당시 경호 시스템에 심각한 허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건 이후 일부 경호 관계자들은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해외로 도피하여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한국과 일본의 수사 결과 차이

 

문세광 사건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수사 결과가 상이하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한국 정부는 문세광의 배후에 조총련과 북한이 있다고 발표했지만, 일본 측은 뚜렷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입장을 보였다. 또한, 문세광에게 위조 여권을 만들어 준 일본 여성 요시이 미키코에 대한 처벌 수위도 한국과 일본이 달랐다.

 

3. 끝나지 않은 논쟁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은 5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수많은 의혹과 미스터리를 남긴 채 현재진행형의 사건으로 남아있다.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관련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암살 사건을 넘어, 권력 암투, 국제 관계, 이념 갈등 등 복잡한 요소들이 얽혀있는 현대사의 비극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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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대연각호텔 화재 참사, 초고층 비극이 남긴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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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7번방의 선물’은 관객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줬다. 그러나 이것이 한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면 과연 ‘웃음’이 쉽게 나왔을까. 지금도 여전히 말이 많지만, 당시만 해도 검찰이나 경찰의 강압수사는 일상적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많은 사건이 조작됐고, 많은 국민이 영문도 모른 채 피해자가 됐다. 인권이라는 것이 이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춘천 강간 살인 조작 사건 정원섭

 

1972927, 강원도 춘천에서 발생한 춘천 파출소장 딸(당시 9) 강간살인 사건은 경찰의 강압 수사와 증거 조작으로 인해 만화 가게 주인 정원섭 씨가 범인으로 몰려 15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건이다.

 

1. 사건 개요

 

사건 발생: 1972927일 오후 850분경, 춘천시 우두동의 한 논둑길에서 발생했다. 당시 피해자는 춘천경찰서 역전파출소장의 딸로, 당시 9세였다.

 

사건 경위: 피해 아동은 하굣길에 자주 가던 만화 가게에 들렀다가, 가게 주인인 정원섭 씨에게 다른 만화 가게에 가서 TV를 보자며 유인당한 이후 논둑길에서 성폭행당하고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고 알려졌다.

 

정원섭 씨의 억울한 누명: 사건 현장에서 피해자의 주머니에서 정원섭 씨의 만화 가게 TV 시청 표가 발견되었고, 당시 경찰은 해결 압박 속에서 정원섭 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당시 박정희는 김현옥 내무 장관에서 이 사건을 10일 안에 해결하라고 했다. 군인 출신의 막가파식 지시였다.

 

 

다시 정리하는 정인숙 살해사건…50년 전 미스터리, 그날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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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찰의 강압 수사 및 증거 조작

 

고문과 허위 자백: 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정원섭 씨에게 제주도 야간 비행이라 불리는 고문을 포함한 가혹행위를 자행하여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증거 조작: 현장에서 발견된 연필은 정원섭 씨의 아들을 데려가 이빨 자국을 내게 하여 증거로 조작되었다. 특히 현장의 연필은 노란색 몽당연필이었으나, 조작에 사용된 아들의 연필은 파란색이었다. 범인의 혈흔이 묻은 팬티의 혈액형이 A형으로 나왔으나, 정원섭 씨의 혈액형은 B형이었다. 정원섭 씨의 만화 가게 여종업원들을 감금하고 가혹행위를 해 정원섭 씨가 성폭행했다는 허위 증언을 강요했다.

 

3. 재심을 통한 무죄 판결 및 국가 배상 문제

 

재심 청구 및 무죄 판결: 정원섭 씨는 15년간의 옥살이 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재심을 청구했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2008년 춘천지방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국가 배상 문제: 무죄 판결 후 정원섭 씨와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1심에서 26억여 원의 배상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소심에서 '소멸시효'를 이유로 단 한 푼도 배상받지 못했다. 당시 소멸시효 기간이 3년에서 6개월로 갑자기 변경된 것이 근거가 되었다.

 

사법부의 자기반성: 재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신의 눈을 갖지 못한 재판부로서는 감히 이 사건의 진실에 도달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적법절차 원칙에 따르자면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은 증거로 사용될 수 없거나 믿을 수 없어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명시하며 당시 수사 및 재판 과정의 오류를 인정하는 이례적인 자기반성을 했다.

 

4. 사건의 영향

 

영화 '7번방의 선물' 모티브: 이 사건은 2013년 개봉하여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7번방의 선물'의 실제 모티브가 되었다.

 

공권력의 남용 문제 제기: 춘천 강간살인 조작 사건은 군사정권 시절 공권력의 오남용과 사법 시스템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진실화해위의 역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사하여 진실 규명 결정을 내리고 재심을 권고하는 등 과거사 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원섭 씨는 2021328,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지병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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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나는 생존자다’, 정명석+정조은 그리고 지존파와 형제복지원 (+수위)

‘나는 신이다’ 두 번째 이야기, ‘나는 생존자다’, 또 메이플이 열고 닫을까 (+JMS +정명석 근정명석의 JMS 신도인 여성 통역사는?…신자라는 PD 관련해 KBS 입장은 이렇다.정명석이 이끄는 기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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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나는 생존자다'가 공개되면서 과거 한국 현대사의 비극 중 하나인 '형제복지원 사건'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다큐멘터리는 JMS, 지존파,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와 함께 형제복지원 사건 생존자들의 증언을 담아내며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과 함께 진실 규명 및 가해자 처벌에 대한 요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형제복지원 사건의 주범이었던 박인근 원장의 가족이 호주에서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호주 현지에서도 상당한 파장이 일고 있다.

 

형제복지원

 

1. 형제복지원 사건이란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에서 운영된 시설로, '부랑인 선도'라는 명목 아래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불법적으로 감금하고 강제 노역, 폭행, 성폭력, 그리고 수많은 죽음을 야기한 사건이다. 당시 정부의 비호와 경찰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길거리에서 단순히 옷차림이 남루하거나 지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이 끌려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만 500명이 넘으며, 일부 시신은 해부 실습용으로 판매되기도 했다. 사건의 주범인 박인근은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특수 감금 등 핵심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고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은 후 사망했다.

 

2. '나는 생존자다' 공개 후 파장

 

'나는 생존자다' 공개 이후, 형제복지원 사건의 생존자들이 겪었던 참혹한 진실이 다시금 알려지면서 시청자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특히, 다큐멘터리에서 박인근 원장의 가족들이 호주에서 운영하는 스포츠 센터와 보석 사업체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들이 과거의 범죄 수익으로 호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형제복지원 박인근
박인근

 

3. 호주에서의 반응

 

호주 현지에서도 '나는 생존자다'의 영향으로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박인근 원장 가족이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호주 시드니의 140억원대 스포츠 센터는 구글 지도 리뷰 등에 '별점 테러'와 함께 비난 댓글이 쇄도하고 있다. 네티즌들은 "형제복지원으로 빼돌린 돈으로 운영하는 곳", "한국의 아우슈비츠", "악마들이 운영하는 곳", "피 묻은 돈으로 세운 시설" 등의 날 선 반응을 보이며,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정의 구현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호주 최대 신문사인 '디 오스트레일리안(The Australian)'은 박 원장 가족이 호주에서 거액의 재산을 환수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과거에도 박 원장을 '오징어 게임'의 배경이 된 가학적인 인물에 비유하며 사건을 조명한 바 있다. 박 원장의 손주 며느리로 추정되는 인물은 SNS를 통해 시부모와 절연했으며, 운영하는 가게에 대한 공격을 멈춰달라고 호소하고 "피해자를 향한 사죄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밝혔으나, 이에 대한 비난 여론은 여전히 거세다

 

 

 

‘나는 신이다’ 두 번째 이야기, ‘나는 생존자다’, 또 메이플이 열고 닫을까 (+JMS +정명석 근

정명석의 JMS 신도인 여성 통역사는?…신자라는 PD 관련해 KBS 입장은 이렇다.정명석이 이끄는 기독교복음선교회(JMS) 피해자 모임 엑소더스 전 대표인 김도형 단국대 교수가 KBS에 폭탄을 던졌다.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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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현재 진행 상황 및 영향

 

'나는 생존자다'는 공개 이후 넷플릭스에서 연일 높은 순위를 기록하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로 인해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 및 사과 요구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최근 법원은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에 대해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다시 한번 내리며 1심보다 8000만원 증액된 18000만원을 국가가 피해자에게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다큐멘터리 방영 후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움직임에도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이며, 법적 구제와 함께 생존 피해자들의 사회적 적응을 위한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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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와우시민아파트 붕괴사고…'34명 사망' 1970년 대한민국 도시화의 그늘 드러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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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25일, 축복과 기쁨이 가득해야 할 성탄절 아침, 서울의 심장부 충무로에 위치한 대연각(大然閣) 호텔에서 굉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1969년 완공된 21층 규모의 이 호텔은 당시 서울에서 두 번째로 높은 '마천루'로, 건설비 17억 8천만 원이 투입된 초호화 시설을 자랑했다. 객실마다 텔레비전이 구비되는 등 당대 최고급 시설을 갖췄으며, 9급 공무원 월급이 1만 7천 원이던 시절 하루 숙박비가 2만 원에 달해 일반인들은 쉽게 발을 들일 수 없는 '낭만의 핫플레이스'로 불렸다. 그러나 이 화려한 외관 뒤에는 치명적인 안전 문제가 숨겨져 있었다. 준공 허가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건축법 완화를 통해 간신히 준공 검사를 통과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비극적인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대연각 화재 사건

 

크리스마스 이브의 야간 통행금지 해제로 밤새 들뜬 분위기였던 호텔은 오전 9시 50분경, 1층 커피숍에서 시작된 화재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화마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화재 참사로 기록됐으며, 전 세계 호텔 화재 중에서도 단연 최대 규모의 비극으로 남았다. 이 사건으로 총 166명이 사망하고(추락사 38명) 6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5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실종자로 남았다. 화재는 호텔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며 당시 소방서 추산 약 8억 3,820만 원의 막대한 재산 피해를 남겼다. 사망자 수에 대해선 출처별로 163명에서 실종자를 포함한 191명까지 다양한 수치가 제시되며, 이는 사건의 혼란스럽고 참혹했던 규모를 반증한다.  

 

1. 불길을 부른 구조적 인재(人災)

 

발화의 시작: 1층 커피숍의 시한폭탄

 

대연각호텔 화재의 발화 원인은 1층 커피숍에 설치된 프로판 가스통의 폭발로 밝혀졌다. 이 폭발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사고의 이면에는 안전을 외면한 여러 구조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 화재를 일으킨 20kg짜리 프로판 가스통은 실내에 보관돼 있었다. 둘째, 가스통과 화덕을 연결한 배관은 금속이 아닌 값싼 PVC 재질이었다. 이 PVC 배관은 내구성이 약해 시간이 지나면서 구멍이 났고, 누출된 가스가 바닥에 고였다. 프로판 가스는 공기보다 무거워 누출 시 바닥에 가라앉으며, 무색무취의 특성 때문에 누출 사실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결국 고인 가스가 화덕 불꽃에 착화되면서 대형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낡은 가스통을 내압 검사도 없이 4년간 사용하고, 저렴한 고무호스로 배관을 설치한 사실은 호텔 경영진의 안전 불감증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불쏘시개였던 초호화 인테리어

 

1층에서 시작된 작은 불길이 순식간에 건물 전체를 집어삼킨 데는 호텔 내부의 구조적 문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호텔 내부는 한지 벽지, 목재 가구, 양탄자 등 불에 쉽게 타는 가연성 물질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초호화 인테리어는 화재가 빠르게 번지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이와 더불어, 화재 확산을 막는 가장 기본적인 설비인 방화문은 비상계단에 의무적으로 설치되어야 했지만, 대연각호텔은 비용 절감을 이유로 방화문을 설치하지 않았다. 방화문이 없는 개방형 계단과 냉난방 덕트는 화재 발생 시 불길과 유독가스를 마치 굴뚝처럼 수직으로 빠르게 확산시키는 '굴뚝 효과(Stack Effect)'를 일으켰다. 1층에서 시작된 불길은 단 1시간 30분 만에 21층 건물 전체를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횃불로 만들었다. 이는 단순히 LP가스가 폭발한 사고가 아니라, 외형적 성장만을 추구하고 안전을 경시했던 1970년대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2. 절규와 좌절의 7시간, 미완의 구조 작전

 

 

다시 정리하는 정인숙 살해사건…50년 전 미스터리, 그날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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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각 화재 사건

①  장비의 한계에 막힌 사다리차

 

화재 신고를 접수한 소방 당국은 서울 전역의 소방력을 총동원하여 1,500명이 넘는 구조 인력을 현장에 투입했다. 그러나 불길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국내에 단 1대뿐인 최신 소방 사다리차는 겨우 7층 높이까지만 닿을 수 있었다. 21층 규모의 호텔 화재 현장에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8층 이상 고층에 갇힌 투숙객들은 창문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구조를 기다렸지만, 소방관들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옥상에 헬기 착륙장(헬리포트)이 없어 출동한 소방 헬기마저도 구조에 실패하며 장비의 열악함이 인명 피해를 더욱 키웠다.  

 

닫힌 옥상문이 부른 비극

 

호텔 내부에 갇혔던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은 옥상으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재 진압 후, 옥상으로 통하는 출입문 앞에서 23구의 시신이 발견되는 참혹한 사실이 드러났다. 호텔 옥상문은 평상시처럼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던 것이다. 비상구가 아닌 이윤을 위한 통제 수단이었던 셈이다. 이는 대연각호텔의 안전 불감증이 얼마나 깊게 뿌리 박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다. 비상 대피로라는 가장 기본적인 안전 원칙조차 지켜지지 않아 수많은 생명이 헛되이 희생되었다는 점은 화재 확산 원인과 더불어 인명 피해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된다.  

 

추락, 그리고 처참했던 시신 수습

 

불길과 유독가스를 피해 창문 밖으로 몸을 피했던 많은 사람들은 창문에 매달리거나 매트리스를 끌어안고 뛰어내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그러나 추락을 막아줄 에어매트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그들의 필사적인 탈출은 곧 죽음으로 이어졌다. 더 큰 비극은 화재 진압 후에 찾아왔다. 불에 심하게 훼손된 시신들은 신원 확인이 거의 불가능했다. 당시에는 DNA 감식 기술이 발전하지 못해 유가족들은 훼손된 시신을 직접 눈으로 보고, 치아나 골격 등 미미한 특징으로 가족을 찾아야 하는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는 화재라는 직접적인 재난 외에, 현대적 재난 대응 시스템의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2차적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3. 대재앙이 남긴 교훈과 변화

 

①  전 사회적 경종: 안전불감증의 대가

 

대연각호텔 화재는 단순히 한 건물의 참사를 넘어, 1970년대 급격한 경제성장 뒤에 가려져 있던 한국 사회의 안전 불감증과 허술한 규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당시 TV를 통해 생중계된 화재 현장은 전 국민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사람들이 불길을 피해 창문 밖으로 매달리거나 떨어지는 장면은 대형 재난이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대연각 화재는 이후에도 계속될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참사 등 수많은 대형 재난의 예고편과 같았으며, 국민의 희생이 있어야만 제도가 개선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게 했다.  

 

대연각법 제정, 소방 시스템의 재탄생

 

대연각호텔 화재 이후, 정부는 안전 시스템을 제도적으로 정비하는 데 착수했다. 이는 그야말로 '사후약방문'이었지만, 한국 사회의 안전 의식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주요 제도적 변화는 다음과 같다.  

구분 화제 이전 상황 화제 이후 변화
소방 장비 소방 사다리차 7층 한계 23층까지 닿는 고가 사다리차 도입
소방 설비 스프링클러, 화재 경보 설비 미설치 스프링클러 및 화재 경보 설비 의무화
건축 규제 고층 건물 옥상 헬리포트 부재 일정 규모 이상 건물 옥상 헬리포트 의무화
보험 및 관리 화재 보험 의무 규정 부재 일정 규모 대형 건축물 '특수시설' 지정 및 화재 보험 가입 의무화
 

특히, 당시 급격하게 대형 건물이 들어서던 시기에 대연각호텔 화재는 대형 건축물에 대한 안전 대책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이 참사를 계기로 스프링클러, 화재 경보 설비 설치가 의무화되었고, 고층 건물 옥상에는 헬기 착륙장이 반드시 설치되도록 법규가 개정되었다. 또한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은 '특수시설'로 지정되어 화재 및 손해배상책임보험 가입이 의무화되면서 안전 관리에 대한 책임이 강화됐다. 한편, 화재 참사 이틀 뒤인 1971년 12월 27일에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되기도 했다. 이는 재난을 독재 정권의 통치력 강화에 이용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보여주며, 대형 재난이 사회, 정치적 맥락과 어떻게 결부될 수 있는지를 시사한다.  

 

4. 화재가 현재까지 남긴 영향.

 

대연각호텔 화재는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갔다. 그러나 이 사건이 남긴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참사 이후 관련 법규가 대폭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발생한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이천 물류창고 화재 등 최근의 사례들은 여전히 현장에서의 안전 관리와 시민들의 안전 의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연각호텔 화재는 단순히 166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을 넘어, 급속한 경제 성장 뒤에 가려져 있던 한국 사회의 부실한 안전 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안전'은 법과 제도가 아니라, 현장의 철저한 관리와 모든 이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의식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이 보고서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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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나는 생존자다’, 정명석+정조은 그리고 지존파와 형제복지원 (+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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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 8일 새벽,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위치한 와우시민아파트가 대규모 붕괴로 무너졌다. 입주를 시작한 지 불과 넉 달 남짓이던 이 아파트는 새벽 시간대에 갑작스레 주저앉듯 붕괴했고, 다수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며 도시주택 공급 드라이브의 허점을 정면으로 드러냈다. 현장에는 잔해더미와 콘크리트 파편이 뒤엉켰고, 구조체가 전단 파괴된 흔적과 함께 기초부가 제대로 하중을 받지 못한 양상이 확인됐다. 주민들은 구조 신호를 보내기 어려운 새벽 시간에 참변을 당했고, 인근 주민과 소방·군 병력이 곧바로 투입돼 수색과 구조가 진행됐다. 초기 구조는 장비와 인력 모두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중장비 투입까지 시간이 걸리면서 골든타임 손실이 컸고, 생존자 수색과 시신 수습은 이틀 이상 이어졌다. 이 사고로 34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으며, 한국 건축 역사상 최악의 부실 공사 사례로 기록됐다.

 

와아시민아파트 붕괴

 

1. 정부 대응.

 

정부 대응은 신속성과 체계성 면에서 뚜렷한 한계를 드러냈다. 사고 직후 관계 부처 합동조사단이 구성됐고, 시공 과정 전반에 대한 전수조사와 책임자 문책 방침이 발표됐다. 서울시는 긴급 대책본부를 설치해 이재민 구호소를 운영했으며, 임시 거처 제공과 생필품 지원이 이뤄졌다. 그러나 초기 현장 통제는 미흡했고, 안전 울타리와 2차 붕괴 대비 조치가 뒤따라 가는 양상이었다. 여론이 거세지자 정부는 해당 단지와 동일 시기에 건설된 다수의 공영·민영 아파트에 대한 안전 점검을 지시했으며, 검찰 수사를 통해 부실시공, 설계·감리 부실, 공사비 절감 압박 등 구조적 문제를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도시주택난 해소를 위한 속도 우선정책이 현장에 과도한 일정 압박으로 전가됐다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됐다.

 

2. 원인 분석

 

원인 분석에서는 기초설계와 시공 품질 저하가 핵심으로 지목됐다. 첫째, 지반 조사와 기초설계가 충분하지 않아 토압과 하중 분산 설계가 부적정했고, 비균일 침하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 철근 배근과 콘크리트 타설 과정에서 규격 미달과 양생 불량 징후가 확인됐다. 당시 콘크리트 품질 관리 기준과 현장 시험 체계가 미성숙했고, 공사 기간 단축을 위한 무리한 공정 압축이 강도 발현에 치명적 영향을 줬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셋째, 감리와 검사 시스템이 사실상 형식적으로 운영돼 설계 변경, 자재 대체, 공법 변경이 관리되지 못했다. 이 세 가지 요인이 결합하며 구조 안전율이 한계치에 다다른 상태에서 국지적 결함이 연쇄 붕괴로 증폭된 것으로 요약된다.

 

 

숭례문 방화사건 시간대 상황과 복구 그리고 범인 채종기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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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건이 사회에 끼친 영향

 

사건은 주택 정책과 건설 산업 전반에 큰 파장을 미쳤다. 첫째, 안전관리 제도 정비가 추진되며 구조계산 검토, 감리 권한 강화, 사용 승인 절차 엄격화 등 규제가 단계적으로 강화됐다. 이후 신축 공동주택에 대한 공사 전··후 다층 심사가 정례화됐고, 시공자·감리자 책임 범위가 확대됐다. 둘째, 공영 주택사업의 추진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물량 중심의 공급 정책이 안전과 품질 관리 프레임을 포함하도록 재설계됐고, 하도급 관리와 자재 규격 준수의 법적 구속력이 강화됐다. 셋째, 사회적 의식 변화가 뒤따랐다. ‘빨리빨리로 상징되던 개발 우선 정서 속에서 건설 안전이 후순위로 밀릴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대형 공사에서의 기술 기준, 현장 품질 시험, 기록 보존의 중요성이 공론화됐다.

 

4. 와우시민아파트 붕괴가 현재까지 끼친 영향.

 

현재까지의 영향은 세 갈래로 정리된다. 첫째, 제도적 유산이다. 공동주택 구조 안전 기준, 철근콘크리트 품질관리 지침, 감리·점검 체계 등은 사건 이후 축적된 개선의 결과물로, 오늘날 착공 전 지반조사 의무화, 공정별 시험·검사, 사용 승인 전 안전 진단 등으로 이어져 있다. 둘째, 산업의 전문성 강화다. 구조설계와 지반공학의 역할이 커지고, 품질관리 기술자, 시험기관의 독립성과 책임성이 제고됐다. 셋째, 시민 감시와 정보 공개 확대다. 공사 현장의 안전 고지, 시험 성적서 관리, 하자 책임 기간과 보증 체계가 사회적 관심사로 자리 잡았다. 이후 국내에서 발생한 각종 붕괴·전도 사고 때마다 와우시민아파트 참사는 반복 참사를 막아야 한다는 교훈의 원점으로 거론돼 왔다.

 

5. 과제.

 

그럼에도 과제는 남는다. 노후 공동주택의 구조 안전성, 소규모 현장의 감리 실효성, 원가 절감 압박이 품질에 미치는 영향 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와우시민아파트 붕괴는 단순한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제도와 현장의 긴장관계를 상기시키는 경고였다. 안전은 비용이 아니라 전제라는 원칙이 정책과 현장 모두에 내재화될 때, 비로소 같은 유형의 참사를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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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3월 1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정두산 부근 강변도로. 한밤중의 적막을 깨고 들려온 비명 소리는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사회를 뒤흔드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른바 정인숙 살해사건’. 고급 승용차 안에서 권총에 맞아 숨진 미모의 여인, 그리고 그녀의 오빠 정종욱 씨가 범인으로 지목되며 사건은 일사천리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단순 살인사건으로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정황들이 너무 많았다. 그녀의 가방에서 발견된 유력 인사들의 명단, 그리고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들. 당시 최고 권력자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며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과연 그날 밤, 강변도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정인숙은 왜 죽어야만 했을까?

 

정인숙

 

1. 화려한 삶 뒤에 감춰진 비밀

 

정인숙은 1947년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미모로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스무 살 무렵, 김재규 소유의 서울 명동의 고급 요정인 선운각에서 일하기 시작하며 그녀의 삶은 화려하게 변모했다. 최고위급 인사들만 드나들던 그곳에서 정인숙은 '정마담'으로 불리며, 재계와 정계의 거물들과 교류했다.

 

정인숙은 일개 호스티스라고 알려졌지만 1960년대 후반에 일반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해외여행까지 다녀올 정도로 입지가 꽤 높은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외로 다녀오는 것은 커녕 비행기 한 번 탔다고 하면 동네 자랑거리였던 시절이었던 데다 이 시기 정부 고관들도 단수여권으로만 해외여행이 가능했으나 정인숙은 당시로서는 희귀한 복수여권으로 여행을 했다고 알려졌으며 1969년 일본을 여행하러 갔을 때에는 놀랍게도 야쿠자들이 경호를 맡았다. 온갖 소문과 음모론이 나올 법했다.

 

그녀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사건 발생 며칠 전, 그녀의 오빠 정종욱 씨가 경찰에 자수하면서부터다. 그는 동생이 자신을 무시하고, 남자 관계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이 진술을 토대로 사건을 종결하려 했으나,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정인숙의 소지품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정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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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다

 

정인숙이 숨진 채 발견된 승용차 조수석에는 그녀의 핸드백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당시 정·재계를 주름잡던 거물들의 명함과 편지들이 가득했다. 이 중에는 국회의원, 고위 공무원, 재벌 총수 등 절대 권력을 가진 이들의 이름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정일권 국무총리, 이후락 주일 대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등의 고위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박정희 대통령까지 적혀 있었다.

 

이들의 정인숙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은 단순한 교류를 넘어선, 은밀한 관계를 암시하고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녀가 이들로부터 받은 고가의 선물과 현금 등이 담긴 수첩이었다. ‘정인숙 리스트라고 불리는 이 수첩은 당시 권력층의 추악한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대한민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정부와 수사 당국은 이 사건을 '남매간의 치정극'으로 축소하려 했지만, 이미 언론과 국민의 관심은 '판도라의 상자'에 쏠려 있었다. 정인숙의 동생인 정종옥은 경찰 조사에서 언니가 고위층 인사들의 아이를 낳았다고 증언했으며, 그녀가 죽기 직전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의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협박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로 인해 사건은 단순 살인사건을 넘어,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였다.

 

정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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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폐된 진실, 그리고 남겨진 의문들

 

사건은 결국 정종욱 씨가 '단독 범행'으로 기소되면서 마무리되었다. 그는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이후 형량이 감경되어 1980년 특사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선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아있다.

 

첫째, 정종욱 씨는 범행 도구인 권총을 어디서 구했는가? 당시 일반인이 권총을 소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둘째, 정인숙의 시신에서 발견된 총알은 미군에서 사용하는 권총의 것이었다. 이는 그녀가 고위층과 깊은 연관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셋째, 사건 현장에 도착한 경찰의 수사가 미흡했으며, 정인숙의 소지품 중 일부가 사라졌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심지어 그녀의 유가족들은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인숙 살해사건은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었다. 당시 권력의 최상층부가 어떻게 은밀하고 부패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치부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어떤 방식으로 사건을 은폐했는지를 보여주는 씁쓸한 단면이었다. 사건 발생 50여 년이 지난 지금, 정인숙의 죽음은 여전히 진실을 숨긴 채,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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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사천시 사천읍 구암리 부근 한 아파트 사이 도로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가해자는 2007년생인 당시 17, 피해자는 2008년생인 당시 16살이다. 이 사건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저녁,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피투성이가 된 남녀가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사천 여고생 살인사건

 

사람들이 평화로운 크리스마스를 보내던 중 한 시민이 "지금 여기 피투성이 된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 빨리 좀 와주세요"라고 신고했다. 구급대원이 도착했을 때 여성(이하 A)은 심정지 상태였으며 남성(이하 B) 또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 A양은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곧 사망했다. B군은 A양을 칼로 찌르고 자해를 한 것이다. 다음 날 경찰은 B군을 긴급 체포했다.

 

이상한 점은 이 둘은 그날 처음 만났다는 것이다. 강원도 원주시에 사는 B군은 2023년 고등학교 1년 때 자퇴하고, A양과 온라인 게임과 채팅을 통해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러다가 이날 이 B군은 A양을 만나러 원주에서 사천까지 온 것이다. 당시 CCTV 영상을 보면 A양은 B군에게 반갑게 뛰어갔다. B군이 A양에게 선물 줄 것이 있다고 불러낸 것이다.

 

얼마 후 경남경찰청에 따르며 B군은 이런 진술을 했다고 한다.

 

“A양이 저를 대하는 태도가 4월부터 달라졌고, 남자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자신 외에 다른 이성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너무 싫었다. A양을 살해하고 나도 휘발유 등으로 자살하려고 했다”

 

경찰 조사 결과, B군은 A양과 4년 전부터 오픈 단체 수다 채팅방을 통해 알게 됐으며 20244월부터 개인톡으로 채팅을 해 왔다. B군은 이때부터 A양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이상하고 남자가 생겼다고 느끼며, 범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정두영, 한국형 연쇄살인마? 사이코패스?…범죄 기록 (+유영철)

실질적 사형폐지국 한국의 1997년 마지막 사형 상황과 현재.(꼬꼬무)가 2004년 경찰 2명을 횟칼로 살해하고 도주해 8일만에 붙잡" data-og-host="www.neocross.net" data-og-source-url="https://www.neocross.net/entry/%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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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여고생 살인사건

 

B군은 범행 도구를 4월과 9월에 인터넷과 동네가게에서 구입했으며 2024년 들어 연락이 줄어든 A양 태도에 불만을 품고 이 같은 범행을 계획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둘은 교제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이 사건은 지난 410일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형사1(재판장 김기동) 심리로 첫 재판이 열렸다. 이날 B군은 공소사실과 검찰이 제출한 증거를 모두 인정했다. 검찰은 B군에게 소년법상 최고형인 징역 20년을 구형하고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20, 보호 관찰 5년도 함께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검찰은 "피해 여고생 B양을 살해할 마음을 먹고 8개월간 범행 방법을 고민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살인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다"고 구형 이유를 밝혔다.

 

2025년 5월 1일, 창원지법 진주지원 형사1부(김기동 부장판사)는 B군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하고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20년을 명령했다.

 

이 사건은 2025510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방송한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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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작 '난쏘공'이 2010년에도 유효하다니

대학때 쓰던 다이어리를 뒤적였다. 그러던 중 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1996년 3월에 쓴 글이다. 아마 이때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한차례 더 읽고 있었던 것 같다.고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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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70년대 한국은 눈부신 산업 성장을 이룬다.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박정희를 찬양하며 그가 쌀밥 먹게 해줬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사실 이는 국민들을 갈아넣은 결과다. 그리고 특히 10대 때 지방에서 올라와 공장에서 일한 여성노동자 (여공)들의 역할이 컸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뼈와 살을 갈아넣던 시대였다. 그러던 중 여성 노동운동 역사에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는데, 그 공간이 당시 전국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들던 섬유제품 제조기업 동일방직이다.

 

1970년대 여공

 

1. 1970년대 여공들의 삶.

 

1970년대 인천에는 광목·포플린·재봉실·혼방직물·면직물을 생산하는 동일방직의 전신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당시 5대 방적업체 중 하나였던 동양방적이다. 광복 이후 동일방적 인천공장이 귀속재산 불하(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되가져가지 못한 한국 내 부동산 및 자산을 미군정이 몰수해 개인에게 파는 것)되며, 동일방직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동일방직은 사실 다른 공장에 비해 시설과 급여 등 여건이 상대적으로 좋았다고 한다. 일하는 직원이 1500명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만큼 노동 강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당시에도 법정 근로시간은 일일 8시간이었지만, 그건 그냥 글자로 명시된 존재일 뿐이었다. 기본 12~14시간 근무가 기본이었다. 그러다보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굶는 게 다반사였고, 노동자 상당수가 위장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니 화장실 역시 제대로 이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가끔 과거 이런 여공들의 영화를 보면 작업복을 입고 그대로 출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이야 당연한 그 탈의실도 마땅치 않았으니, 작업복 입고 출근하는 것이 편했던 것이다.

 

여타 방직공장처럼 동일방직도 여성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남녀성비가 28이었다고 한다. 예상하다시피 남자들은 대부분 관리직이다. 그러다보니 임금 차이도 당연했다. 여성 노동자 입사 당시 시간당 급여가 70원이었다면 남자는 500~700원 선이었다고 한다. 단순하게 계산해서 하루 13시간 일하면 1000원도 못 버는 것이고, 한달 내내 일한다고 해도 3만원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활동에서도 차별받았따. 당시 모든 노조가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산하였고, 사실상 다들 어용노조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동일방직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부장을 포함해 관리자는 모두 남자였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를 최초로 깬 것이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었다.

 

 

A급 B급 인재들이 기피하는 윤석열 정부, 그래도 F급 폐급 사용은 아니지 않나.

‘김문수를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임명’. 같은 날 전해진 이 2개의 뉴스는 유시민이 윤석열 정부의 ‘급’평가를 한 말을 새삼 다시 떠올리게 했다. A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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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방직 여공

2. 노조 그리고 동일방직 사건

 

도시산업선교회 소속 조화순 목사는 동일방직에 위장취업을 했고, 그렇게 알게 된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법과 노조 교육을 실시했다. 이를 통해 여성노동자들은 그간 자신들이 겪어온 대우를 자각하고 대의원 41석 중 29석을 여성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1972510일 열린 동일방직 노조 정기대의원회의에서 주길자 씨를 여성 지부장에 앉혔다. 동일방직 최초를 넘어, 한국의 최초 여성 지부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주 지부장은 노조 집행부를 전원 여성으로 구성했고, 노동자 권익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첫 여성집행부가 탄생한 이후, 기존의 노조 집행부와 사측은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 무시했다. 그런데 임기 내 많은 것을 변화시켰고, 19752월에는 이영숙 씨를 2대 여성지부장으로 앉히기까지 하자, 사측은 위기를 느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대의원회의 선거를 앞두고 사측은 남성 노동자들을 동원해 와해 작업에 나섰고, 여성 집행부 측과 반대 측의 비율이 대등한 비율로 선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는 같은 해 723일 반대 측은 일방적으로 대의원회를 개최했다. 기존 여성집행부를 불신임하고 자신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집행부를 조직하려는 심산이었다.

 

 

사회적 주제와 독특한 스타일의 영화 '하녀'

공포 영화이긴 하다. 그러나 1960년대의 사회적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화 그 자체로만 본다면 이는 공포라기 보다는 '코믹'에 가깝다. 물론 1960년대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공포와 2009년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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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이영숙 지부장과 당시 총무부장이었던 이총각씨는 경찰에 연행됐고, 여성노동자들은 파업을 선언하고 강당에서 항의 농성에 나섰다. 당시엔 파업은 사실상 불법으로 여겨졌던 때로, 25일 경찰이 출동해 강제해산에 나섰다. 경찰과 사측의 진압에 여성 노동자들은 반나체로 맞섰다. 알몸 시위에 나선 것이다.

 

임기를 다 못 채우고 떠난 이영숙 지부장의 빈자리는 이총각씨가 이어받았다. 그리고 1978221일 새로운 지부장 선출을 위한 정기대의원선거가 열렸다. 표는 이날 오전 6시부터 치러졌다. 교대 시간에 맞춰 투표장에 노동자들이 하나둘 들어서는 순간, 어디선가 반대 측 노동자들이 드럼통에 인분을 한가득 담아 투척하기 시작했다. 통째로 뒤집어씌우기도 하고 입과 속옷 안으로 집어넣기도 했다. 당시 이 모습을 동일방직 공장 근처 사진관을 운영하던 이기복 씨가 촬영했다. 이기복 씨는 여공들의 부탁으로 촬영했고, 사측의 협박에도 보관하다가 이후 여성 노동자들에게 줬다. 여성노동 역사의 한 역사를 기록한 셈이다.

 

결국 회사 뜻대로 노조는 남성 집행부가 집권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이후 이총각씨 등 간부를 포함한 124명의 노동자는 동일방직에서 해고됐다. 이후 80년대 초까지 복직투쟁을 쉬지 않고 이어갔지만 회사로 돌아가진 못했다. 결과적으로 여성집행부의 노조 정상화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일자리도 잃었다.

3. 투쟁 그 이후.

 

문제는 그 이후였다. 해고 노동자들은 블랙리스트 때문에 온갖 직장에서 받아주질 않았고, 동일방직 출신임을 숨겨도 무자비하게 해고됐다. 게다가 경찰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분류된 탓에 일일이 감시를 받았으며 시집을 가도 시댁으로부터 학대를 받는 등 온갖 박대가 이어졌다고 한다.

 

이후 해고 노동자들은 노동단체, 생활협동조합, 시민사회단체 등지에 몸담으며 각자의 길을 걷다가 2000년 김대중 정부가 민주화운동 보상신청을 받으면서 재집결했으며, 2001년에는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었다. 같은 해 최종길 교수의 막내동생 최종선이 중앙정보부 재직 시절 동일방직 노조탄압이 중앙정보부와 연계돼 있다고 진술했다. 뒤이어 해고 노동자들은 복직투쟁을 전개했지만 사측은 그때의 해고가 정당했다 하여 복직시켜주지 않고 있다.

 

2010년에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청계피복노조 등에 대한 인권침해 사건 결정문을 발표하면서 동일방직 등의 블랙리스트 문제가 공식적으로 확인됐으나, 2014년에 대법원은 국가폭력에 대한 정신적 위자료 청구에 대해 '국가와 화해가 성립됐다'는 이유로 패소 판결을 내렸다. 다만 2017년 문재인 정부 수립 후 정신적 손해배상에 대한 국가청구 금지가 위헌으로 판정되어 201812월 서울고법 파기환송심에서 국가배상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이는 SBS '꼬리에 꼬리는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를 비롯해 많은 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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