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닭근혜가 고도로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고도'는 보이지 않고, 그냥 '바보' '아이 수준의 지능'에서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 주변 애들은 전략은 짜지 않고, 닭근혜 비위 맞추기만 하다가 계속 뒤통수만 맞고 있다. '봉숭아 학당'도 이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일어난 후 닭근혜의 일당들의 첫 헛발질(?)은 대국민사과다. 제대로 밝히고 사과했으면, 탄핵 여부에 영향을 더 많이 미쳤을 거다. 물론 이렇게 정직한 인간이었으면 그동안 이런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테지만, 막판에 '인간 코스프레'하고 정직해졌으면 큰일날 뻔했다.
두번째 헛발질은 특검 조사 회피다. 현직 대통령 위치에서 조사를 받았다면 여러모로 닭근혜에게 유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추후 헌법재판소 판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닭근혜와 그 멍청한 주변 일당들이기에 당연히 피할 것이라 예상했다.
세번째 헛발질은 헌재에 나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앞서와 같다. 자격이 정지되었지만, 대통령이란 자리에는 있었다. 유리한 위치다.
여기까지는 분명 주변에서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한국말 구사도 논리적으로 하지 못하고 어버버하는 닭근혜가 특검 조사와 헌재 출석해 이상한 소리르 해서 상황이 더 불리해지지 않을까라는 고민 말이다. 그렇다면 주변에서라도 제대로 준비해야 하는데, 박사모 같은 지지자들에게만 감정 호소하는 전략을 택했고, "설마 탄핵까지 가겠냐"라는 멍청한 판단만 일관되게 했다. 이는 닭근혜가 탄핵 후 연거푸 물어봤다는 것과 자격정지 기간 중 박사모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네번째 헛발질은 삼성동 집 앞에서 행동이다. 탄핵 불복 메시지를 민경욱이라는 제 정신 아닌 국회의원을 통해 발표했다는 것이다. 사과가 아닌 국민들의 뜻에 반하는 태도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구속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마지막이 이번이다. 성실하게 재판에 임했다면 아마 이번에 구속 연장 결정은 결정되지 않았을 것이라 본다.
그런데 구치소 안에서의 호화 생활, 말도 안되는 꾀병, 불성실한 재판 태도, 변호사들의 비논리적이며 감정적인 반박은 상식적으로 구속 연장의 불가피성을 스스로 보여준 것이다. 한마디로 6개월만 버티면 된다는 '시간끌기' 전략이 실패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닭근혜와 주변 사람들은 전략을 다시 살펴봐야 '정상'인데... 역시 이들은 비정상적인 것들이다. 변호사들은 일괄사퇴를 표명했고, 닭근혜는 법 판단이 아닌 정치 보복 프레임을 짜려고 한다. 이젠 드러눕기를 시도하고 있는거다.
그런데 앞서 네번의 헛발질은 이야기했지만, 이런 태도는 국민이나 법조계로 하여금 실소만 나오게 한다. 오죽하면 벌써 변호사도 국선으로 해, 세금을 이용하려 하느냐는 말까지 나온다.
아마 조금만 전략을 잘 짰다면, 닭근혜를 이용해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이가 아니라, 진짜 닭근혜를 위한 사람이 조금만 있었어도 닭은 적어도 구속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는 태극기와 책 들고 나와 자기 홍보 하고 어떤 이는 자기 살자고 줄줄이 이야기 해대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애초 닭근혜도 사람을 믿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도 닭근혜는 그저 애용 대상일 뿐이었다. 암튼 한심한 일당이다.
종로 피맛골의 해장국 명가 청진옥이 신관을 새롭게 열었다. 반가운 일이다. 1937년 문을 연 이후 피맛골에서 자리를 지켜온 청진옥은 피맛골 재개발 사업으로 9년전 현 르메이에르(아직도 발음이 어렵다) 1층으로 강제(?) 이주했다.
맛은 변함 없었지만, 분위기를 확실히 달랐다. 르메이에르라는 거대한 빌딩의 부속품이 된 듯하기도 하고, 프랜차이즈 해장국집으로 변한 것 같기도 했다.
오래된 맛집은 맛 뿐 아니라 공간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 단골들은 맛 뿐 아니라 그 공간에 묻어있는 추억을 느끼러 온다. 친구들과, 아들을 데리고, 손자를 데리고 와 자신이 그 공간에서 누구와 밥을 먹고 술을 마셨으며, 어떤 성장 과정의 흔적을 남겼는지 이야기한다. 맛만 느끼는 것은 절반의 기억이다.
청진옥에 대한 나의 기억도 그렇다. 20대 중반부터 찾기 시작한 청진옥은 재야의 종소리를 들은 후 찾아가 새벽 첫 지하철까지 버티던 곳이다. 2002년 월드컵 때 선배들과 축구 이야기를 하던 곳이다. 이후 직장이 용산, 상암동, 강남 등으로 옮기면서 뜸하긴 했지만, 종종 찾아가 깊은 맛을 느꼈다.
피맛골이 재개발 되고 추억이 몽땅 사라질 때, 그 한켠에 청진옥도 있었다. 르메이에르 1층으로 저리잡은 후 찾아갈 때 이질감이 생겼다. 선배들과 후배들과 마셨던 자리가 없어졌기도 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청진옥이 무슨 프랜차이즈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청진옥 신관도 사실 새로운 공간이다. 그럼에도 앞에 반갑다고 한 것은 적어도 그부속품 같은 느낌은 사라졌다. 아마 단골들에게는 과거 추억을 새길 장소는 없어졌어도 새 추억을 만들 공간이 9년만에 만들어졌다는 기대감도 있을거다. 청진옥이 앞으로 100년을 이어 나갈 자리를 찾았다니 믿어보자.
글, 말, 논쟁, 명분, 실리... 조선 시대 지배층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든, 부정적으로 표현하든, 이 단어들은 어김없이 등장했고, 지금까지도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영화 <남한산성>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겁겠다”라고 생각했다. 당연하다.400페이지에 가까운 소설은 어느 한번 빈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380년 전의 스산한 겨울의 분위기를, 초췌한 백성들의 처참함을, 각기 다른 생각으로 왕과 나라를 생각하는 어느 신하들의 절규를 고스란히 전달했다. 글 하나가 문장 하나가 생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영화로 옮겨지면서 소설이 보여주는 스펙트럼은 줄어드는 대신, 한 곳에 집중해 밀도감을 높였다. 백성과 병사들의 이야기는 줄어들었고, 왕과 신하들의 이야기 즉 지배층의 스토리에 초점을 맞췄다. 앞서 언급한 글, 말, 논쟁, 명분, 실리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남한산성>을 중심적으로 가득 채우는 것은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의 말(言)이다. 순간의 치욕을 참더라도 조선의 명맥을 이어가려면 청나라에 항복을 해야 한다는 명길과 대의를 위해 끝까지 청과 싸워야 한다는 상헌의 논쟁은 영화 지분의 8할 이상이다.
이들의 논쟁이 다른 신하들의 흐름을 잡고, 인조(박해일)의 생각의 방향을 제시하며, 청의 움직임을 예측케 한다. 관객도 마찬가지다. 상헌의 말에 따라가다가, 명길의 말을 이해한다. 그러다가 다시 상헌의 입에 눈길을 보내다가, 명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이들의 말은 충돌해 부서졌다가 다시 합쳐지고, 그 과정에서 갈려서 빛을 내다가 굳건한 칼이 된다. 상대를 베기도 하고, 나를 지키기도 하지만 거꾸로 상대의 힘(생각)을 키운다.
과거 어느 이가 통찰력 있는 이들의 논쟁은 무협지 속 고수와 같다는 말을 했는데, 이병헌과 김윤석이 보여주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논쟁이 그러한 느낌을 준다.
영화와 소설 속 명길과 상헌은 분명 왕과 국가를 위한다. 결과적으로 누가 맞고 틀리다를 논할 수 없다. 그건 결과론적인 해석이고, 그 시대를 살지 못한 후손들의 일방적 판단이다. 하다못해 항복문서를 쓰지 않으려 하는 대신들, 즉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부정적으로 남기지 않으려는 이들의 모습도 어느 시점에서 판단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최명길이 후세에 다양하게 평가되거나 김상헌이 이와 대비돼 평가되는 등의 역사적 사실은 논외로 하자)
이들 명길과 상헌의 말의 겨룸에 간간히 의지를 내보이는 인조의 말도 얄팍하긴 하지만, 스스로 힘을 발하긴 한다. 다른 신하들의 말이 공감 안되는 명분과 스스로의 삶을 위한 것으로 비쳐진 것에 비해 그나마 인조의 말은 주체적 이려고 애 쓴다. (이 부분에서 박해일 캐스팅이 안성맞춤이라는 평가도 있다. 나약한 이미지이면서도 자존심은 놓으려 하지 않는 지질함을 잘 드러내는 배우라는 평)
앞서 언급했듯이 이런 말의 부딪침에 포인트를 맞추다보니,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공간의 스산함과 백성들의 고단함의 표현은 다수 무뎌졌다. 그 때문일까. 서날쇠(고수)와 동생(이다윗)의 존재감은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다. 도리어 소설에서는 흐름의 한 축을 맡았던 서날쇠가 영화에서는 존재감이 흐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수라는 배우의 존재감이 서날쇠라는 인물의 역할의 방향을 틀어버린 것이다. 소설의 서날쇠는 시대를 보여주고,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였다면, 영화 속 서날쇠는 갑자기 영웅이 되어 있다. 한낱 대장장이가 무관을 손쉽게 제압하고, 군대의 눈을 피해 도망가는 수준이니 말이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상업적으로’ 잘 만들었다. 누구의 말처럼 영화를 본 후에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명길과 상헌의 입장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49일간의 어두운 시대상을, 치욕적인 조선의 역사를 그려낸 영화 치고는 짙은 여운은 의외로 없는 편이다. 보는 이들마다 다르겠지만, <광해>의 경우에는 몇 번을 보더라도 여운을 남기는 포인트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 부분에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광해>는 감성을 건드리는 연출이었다면, <남한산성>은 이성을 표현하는연출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광해>는 인물과 인물이 감정을 섞었지만, <남한산성>은 말과 말이 충돌하고 갈린다. 여운은 감성을 건드릴 때 나온다. 이것이 흥행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예상할 수 없다. 배우들의 호연에 무게를 둘지, 여운에 무게를 둘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정진석은 노무현 정부 당시 생산된 '국정브리핑 국내언론보도종합 부처 의견 관련 협조 요청'이라는 제목의 국정홍보처 공문을 공개했다.
이 공문은 앞2013년 이노근 전 의원(새누리당)이 공개한 문건으로 “해당 언론사의 인터넷 홈페이지 해당 기사에 부처 의견 실명 댓글 기재”, “각 부처 출입기자에게 관련 기사와 부처 의견을 메일로 송부”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정진석이 이 문건을 가지고 이렇게 말한다.
"노 전 대통령 지시로 주요 언론보도 기사에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댓글을) 달라고 지시한 문건이다. (수신자) 맨 앞이 국정원이다. 국정원에 댓글을 달라고 했다. 이게 도대체 자유민주주의 국가서 이런 발상이 가능한지 저는 소름이 끼친다. 이게 오늘 현재 이 시각에 문재인 정부서 자행하는 언론장악 기도 음모의 현주소고 대한민국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다. 사람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멍멍이 인증일까.
이명박 정부는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가 비공개로 ‘댓글 부대’를 동원해 특정 정치인이나, 진보성향의 문화계 인사, 학자들을 대상으로 인신공격하거나 비하하며 여론을 조성하려 했다.
노무현 정부는 국가부처가 실명 댓글로 언론보도에 대한 정부 정책을 의견을 밝히라고 한 거다.
이것을 같은 급으로 보는거다. 초등학생도 이거 보고 "어 같은 짓이네" 말하지 않을 수준이다. 물타기를 하려고 해도 정상적으로 해야, '앗'하고 놀라는 모습이라도 보일텐데 이건 뭔 바보 인증에 어이없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