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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재산권의 개념에 대한 오해를 불러오고 지적재산권법을 깨뜨리는 것이 정당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것이 우려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선정했습니다.
 
이에 대해 여러분들은 어떤 대응 전략을 마련하시겠습니까?

 

 

우선 위의 질문에 대답을 하죠. 대응 전략은 아주 간단합니다. 왜 그것이 잘못되었는지, 국민에게 알려주면 됩니다. 설득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왜 맞고 틀린지 인식을 했다는 전제가 있어야 설득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인 방법은 바로 국정홍보처가 이 글 (트랙백 주소 참고)처럼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지적재산권법에 대한 상대의 문제제기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는 해놓고, 왜 잘못되었는지 설명은 하지 않은 채, 다시 그 '우려스럽다는' 내용을 버젓이 게시하며 "이것봐라, 오해있는 내용을 이렇게 게시하는 것은 우려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한다면, 보는 이들은 일단 고개를 옆으로 돌릴 수 밖에 없습니다.

 

정책을 설명하고, 잘못된 보도에 대해서 반박하려면, 정부측에서 흘러나오는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왜!!!' 를 설명해야 합니다.

 

정책보도, 반박보도는 소설이 아닙니다. "자 봐라. 행간을 읽어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숨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냐"라는 태도로는 곤란합니다. 또한 '그것에 관한 기본지식도 없냐"라는 식의 태도 역시 안됩니다. 그런데 현재 위의 지적재산권만 하나 가지고 본다면 그런 태도가 보입니다.

 

혹 DMCA에 대한 정보(위에서 말한 오해의 부분)를 이미 홍보처측에서 배포했는데, 제가 못 찾았을지도 몰라 국정홍보처 검색창에 쳐봤습니다. (직접 쳐보시길)

 

3건 나옵니다. 위의 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분석 1팀이 올린 그 만화에는 원래 본문이 달려 있습니다. (원문 : 기술적 보호조치를 법 위의 법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 그런데 그에 대한 반박은 하나도 없이 '오해' '우려' 등의 추상적 표현으로 초점을 흐트려 놓고 있습니다.

 

물론 예시로 올렸기에 진지한 응답을 안해도 된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더불어 이미 홍보처내 분석 1팀 사이에서는 충분히 논의되었기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홍보처 외의 사람들도 알고 있다는 일종의 무언의 동질성을 자의적으로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홍보처에서 나온 글이나 말이라며 짧은 에세이 일지언정 충분한 설명과 이해시키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홍보처가 고민하는 대응전략의 베이스는 바로 그 '문제의 글'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잘못된 정보가 인터넷공간으로 퍼지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지만, 대응방법을 잘못해서 두고두고 신뢰를 깎아먹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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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쌀은 협상대상에 넣자는 미국측의 요구에) '한미FTA를 깨고 싶으면 쌀을 포함시키라'고 얘기했었다"


7일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국회 통외통위에 출석해 한 말이라고 한다. 김본부장과 미국측 대표와 이야기를 한 자리를 보지 못했으니,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의 전례로 봤을 때 과연 김본부장이 당당하게 저런 이야기를 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생각난 것은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 (솔직히 대통령이라 말하기도 싫다)이 국민에게 고개를 숙이며 한 말이다.


"저는 그동안 우리 쌀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나 국민에게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하며,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1993년 12월 9일...우루과이 협상단이 '쌀 개방 불가'를 공언하며 스위스 제네바로 떠난 지 7일째 되던 날이었다.


당시에 마지막 협상이 진행될 때, 기자들이 개방 여부를 묻는 질문에 "클린턴과 쌀 이야기를 한 적 없다"라는 엉뚱한 답변만 내놓던 김영삼이었다. 이때 알아봤어야 했다.


협상단장인 허신행 농림부 장관은 미국 농림장관에게 농민시위 사진을 보여주며 "미국 농민 1만5000명과 한국 농민 600만 명 중 누가 더 보호돼야 하겠느냐"고 호소했다.


그러나 결국 쌀 개방은 '10년간 관세화를 유예하되 국내 소비량의 4%까지 점진적으로 수입을 늘릴 것'으로 타결됐다. 전문가들은 최선의 결과라고 평가했지만, 농민들은 배신감을 감추지 못했다.


김현종 본부장의 말을 믿고는 싶다. 그러나 웬지 믿었다가는 그 믿음에 대한 대가로 '배신감'이란 감정만 또 가질 듯 싶다. 쌀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배신감도 있지만, 현실을 진실을 본질을 이야기하지 않아 농민들에게 국민들에게 미리 대응할 수 있는 여지조차 빼앗은 행위는 앞으로 대한민국 정부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결정지을 것 같다는 생각에 불안하기까지 하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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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 끝나면 으레 'K리그'를 살려야 월드컵에서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곤 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또 어느 샌가 이러한 논의는 사라지고, 4년 뒤 월드컵 시즌이 돌아와야 다시 되풀이한다.

이번에 K리그에 대한 논의를 보면서 어느 기자 말대로 "회사 부도나게 생겼는데, 우리 물건 사달라"라는 식의, 품질은 따지지 말고 일단 애국심에 호소하는 행태가 너무 눈에 선해서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K리그의 활성화. 좋은 이야기이고, 적극 공감한다. 하지만, 리그 활성화의 주체는 팬들이 아니다. 선수이고, 구단이다. 팬들은 이들의 모습을 보고 움직이며 즐기는 사람들이다. 간혹 어려울 때 같이 하는 것이 진짜 팬이라는 말을 하는 네티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기대감을 동반한다. 언제가는 자신들에게 휼룡한 플레이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감 말이다. 그런데 그 기대감을 줄 생각은 없이 무조건 읍소하는 모습은 팬들을 도리어 떠나보내는 작태일 뿐이다.

K리그 논의중 한 부분은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반대 입장을 연상케 했다. 기회를 달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일부에서는 리그 팬들에게 일단 와서 봐보고 결정해달라고 말한다. 꽉 찬 경기장을 보여주고 그래도 마음에 안들면 비판을 해달라고 요구한다. 스크린쿼터제도를 지켜 한국영화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스크린쿼터제가 지켜지지 않으면 한국영화는 발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K리그에게 기회를 안 주었던가? 아니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난 후 K리그에는 대표팀 선수들을 보려고 경기장에 팬들이 몰렸다. 서로 서포터즈에 가입하며 월드컵 분위기를 이어나가려 했다. 그들을 내팽겨친 것이 과연 누구인가. 팬들의 냄비속성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렇다면 선수들이나 구단들은 양심이 없다. 팬들을 경기장 밖으로 내몬 것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은 죽는 소리를 하며, 한국 영화 부흥을 위해 스크린쿼터가 지켜져야 하며, 이것이 곧 우리 문화를 지키는 것이라 말한다.  일단 문화부분은 한번 논했으니 넘어가자 (내가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 ) 기회를 달라는 부분에서 한국영화가 점유율이 80%를 넘나들며, 사상 최대의 흥행을 누릴 때 그들은 진정 우리에게 질적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적은 없는 것 같다. 오로지 스타 개개인의 몸가치만 올리려 노력한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관객들은 자기 돈 써가면서 충분한 기회를 몇년간 줬다. 이를 살리지 못한 것은 영화인, 영화계이다. (마지막 임권택감독님이 1인 시위를 나왔을 때, 그동안 1인 시위를 했던 젊은 스타들은 왜 하나도 안 보였는지..내 눈에는 그들은 어차피 전날 쇼맨십을 펼쳤으니, 이제 기획사의 의도대로 자신들의 돈벌이때문에 바쁜 걸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았는지..비판하고픈 영화계지만, 이들에게는 비판도 후하다...비난하고픈 생각밖에 안든다)

영화계나 K리그는 아직 정신 차리려면 멀었다. 일부에서는 외국영화계에 한국영화가 먹힌다음에 후회해도 소용없다고 말하지만, 그 후회는 영화인들의 몫이다. 관객들은 눈이 높아졌고 냉정해졌다.

유럽리그를 새벽마다 시청하는 이들에게 K리그도 무엇을 줄지 고민해야 한다. 늘 '수준'만을 탓한다면 팬들의 외면 역시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 뭐라 말 하는 것조차 창피해 해야 한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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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소수자는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 홍석천씨처럼 커밍아웃한 사람과 하리수씨처럼 트랜스젠더로 변신한 사람으로 말이다.


전에 어떤 인터넷 신문의 헤드라인처럼, 홍석천씨는 사회적 배신을 했고, 하리수씨는 사회적 변신을 한 것이다. 외모지상주의때문일 수도 있겠다. 또는 거부감의 대상과 호기심의 대상의 차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남성이 스스로의 성적 지향이 여성이 아닌 남성을 향해있다는 것은 남여 결합이 인류사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베이스에 깐 사회적 인식에서 보자면 '거부감'의 대상이지만, 여성으로 변한 남성의 모습은 일단은 '호기심 + 상품성'의 가치를 지닌다.


아마 그래서 상품성을 지닌 이들이 지금도 어두운 클럽과 유흥업에 종사하고, 거부의 대상이 사회의 눈을 피해 그곳을 찾는 현상이 극히 자연스러운 결합으로까지 보인다.


6년전 홍석천씨가 커밍아웃을 선언할 때 난 미쳤다고 생각했다. 성적소수자로서의 사회에 대한 절규가 미쳤다는 것이 아니라, 극히 자연스럽지 못한 등장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이 글을 트랙백을 보낸 글도 포함해서) 그의 선언이 사회적 파장을 낳았다고 하면서, 선구자적 위치를 그에게 선사해주었지만, 나에게 준비되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 포용하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편견을 없애자는 말은 당연하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 편부편모에 대한 편견, 외모에 대한 편견,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편견 등등 이 세상 수많은 편견들은 사라져야 하고, 하나의 인간으로 모든 것은 평가받고 어울려야 한다는 원론적이고 지극히 당연한 말을 나도 공감한다.


하지만 편견은 (그것이 비록 잘못되었더라도) 어떤 경험들이 축적된 산물이다. 충격요법으로 쉽게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껍질을 깨기 위한 홍석천씨의 고통은 이해하지만, 누적된 인식을 향해 파장만 울린다면 그 다음은 대책없이 굴러가기 때문이다.


6년전, 홍석천씨의 커밍아웃은 언론에 이슈 '꺼리'로만 적당했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어쩌면 첫 껍질을 깬 그의 행동에 그것 하나로도 충분한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것은 다양성에 대한 혼란스러운 지금, 커밍아웃을 했다면 홍석천씨 스스로에게나 받아들이는 사회나 좀더 무난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의 외침이 있었던 6년전이나 지금이나 성적소수자에 대한 인식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물론 트랜스젠더에 대해서는 조금 관대해 진 것은 사실이지만, 남성의 몸을, 여성의 몸을 지닌채 성 정체성에 혼란스러워 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아직 차갑기만 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아직은 다양하지만 그 다양함에도 분명 선이 그어져 나눠지는 사회라는 것이 새삼 다시 느낀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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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오락성 영화다. 의미를 주고자 하면 한없이 줄 수 있고, 의미따위는 집어던지고 보자면 그냥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좋은 영화다. 초등학교때 종종 책이나 TV에서 보던 권선징악형 만화라고 보면 가장 무난하다.


돌연변이 인간들에게 극한 공포감을 느끼는 아주 평범한 인간들. 사실 현실에서도 느끼지 않는가. 미친 도사견 한 마리가 도심 한 가운데 풀려 돌아다닌다면, 총이나 방어할 무기가 없는 한, 사람들은 무한한 공포를 느낀다.


실제 있었던 일이지만, 극장에 뱀 한마리가 풀려있다는 말을 들으면 극장안은 순식간에 공황상태에 빠진다. 뱀 한 마리에 말이다.


그런데 그런 류의 인간이 수십명이 나와 아주 평범한, 총밖에 쏠 줄 모르는 인간들과 대치한다. 정말 공포스럽지 않은가.


제목을 달때 난 전쟁의 시작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머리에 떠올랐다. 영화는 3편으로 끝나고 최후의 전쟁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정말 돌연변이들이 많이 나타날 여지가 있는 세상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우리와 아주 조금 다른(?) 장애를 안고 사는 이들에게도 이질감을 느끼고 사는데, 정말 X맨과 같은 이들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조금 더 편하자고 만들어 놓은 모든 것들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 아해소리 -



영화관련 몇몇 블로거들의 글....


http://blog.naver.com/kdh44u/50005771889


http://blog.naver.com/pocopy/50005441952


http://blog.naver.com/thombo/150005737510


http://blog.naver.com/sweet356/80025615047


http://blog.naver.com/reteina/110005416970


http://blog.naver.com/moreno5788/40025445888


http://blog.daum.net/detachment82/3428717


http://blog.daum.net/kangdante/8558512


http://blog.naver.com/hakkais/70005615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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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연이 스타골든벨에 들어온 것을 보고 말들이 많다. 뭐 이미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는데 왜 또 시빌까...아마 SBS와 KBS는 크게 다르다는 점을 우선 꼽았을 것이다. 사기업과 공기업의 차이...때문에 이승연이 공기업에 감히 발을 디딘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들이 방송에 나올 때마다 머리속에 드는 생각은 방송국이 모든 시청자들을 대변하는 '면죄부 발행기관'역할을 하려한다는 것이다.


신정환이 여걸식스인가 나올 때 정확하게 기억이 안나지만, 자막이나 분위기가 아래와 같았다.


"그동안 정말 고생했던 신정환, 때문에 속죄의 마음으로 시청자들에게 보다 많은 웃음을 주려 하는 신정환. 이들을 따뜻히 안아주는 여결식스. 정말 그리웠습니다"


은은한 음악과 더불어 이러한 뉘앙스의 자막이 깔리고, 여걸식스 멤버들이 하나씩 포옹하는 장면이 나가면 신정환은 이제 죄를 용서받게 된다. 이 무슨 어처구니 없는 장면인가.


여타 인터넷 언론들도 사진 하나 올려놓고 "힘든 시기를 지나~" "팬들에게 속죄의 마음으로~" "보다 열심히 하는 연예인의 모습으로 태어나길 바라며~" 등등의 헤드라인과 내용을 깔아주고 연예인 되살리기에 열심인 것은 마찬가지다.


동방신기의 한 멤버가 최단기 복귀를 했을 때, 비판하려 흉내내는 매체들 역시 동방신기측 입장을 설명하며 '자숙의 기간을 가진~" "화려하게 복귀~" "팬들의 성원에 응답하듯~"등등의 표현을 서슴없이 썼다. 뭐하자는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장면, 자막, 음향까지 총 동원해서 면죄부를 발행해 주는 곳은 방송국밖에 없다. 그러면 끝이다. 이렇게 한두 프로그램에서 얼굴을 내밀면, 그 다음부터는 언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냐는 듯이 당당히 오락프로그램을 활보한다.


방송국 게시판이나 포털 게시판에 난리를 쳐도 소용없다. 이때는 이미 "용서하자"는 팬들까지도 생기기 때문에 (그것이 진심인지, 아니면 언론플레이에 넘어간 것인지 모르지만) 이미 게임은 끝났다.


다시 말하지만 방송국은 면죄부 발행기관이 아니다. 여론을 만드는 역할도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여론조성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굳이 정치적, 사회적인 대형 이슈뿐만 아니라, 연예계 등 타 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계속 면죄부를 발행하는 한, 연예인들은 자신들이 사회에 보여준 추태를 덮을 든든한 배경을 갖게 되며, 이는 곧 이들을 특권층화 시켜버린다. (물론 지금도 유사하게 행동하지만..)



-아해소리-



ps.글을 끄적이고 뉴스를 봤다......김상혁도 곧 컴백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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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회장 이기태)는 최근 정보통신부, 산업자원부, 공정거래위원회 등이 후원하는 개인정보보호 우수사이트에 특허청, KTF(도시락, 커플파이, ktf.com), 마케터잡, 패션데이, 사이버국제특허아카데미 등 총 12개 사이트가 인증심사를 거쳐 최종심의를 통과하고 6월 30일 인증서를 취득한다고 밝혔다.

금번 신규 인증심사에는 총 15개 사이트가 신청했으며, 약 3개월 동안 온라인 모니터링 및 회원가입 테스트, 서류심사 및 사실심사, CEO 면담 등을 거쳐 정보보호마크 인증위원회(위원장 이교용)의 최종심의를 통해 확정됐다.

이번에 개인정보보호 우수사이트를 취득한 업체(기관)는 특허청(특허청), KTF(도시락, 커플파이, ktf.com), (주)인포하임(마케터잡), 에듀하우스(주)(유학네트), (주)정호코리아(패션데이), 한국발명진흥회(사이버국제특허아카데미), 명의도용방지센터(명의도용방지서비스), 한국원자력문화재단(한국원자력문화재단) 등 10개 사이트이다.
(중략)


[한국정보통신산업협의회]


KTF는 지난달 외주 이벤트 업체가 실시한 프로모션 행사에서 참가고객들의 일부 개인정보가 유출됐다고 밝혔습니다. KTF는 "이벤트 업체가 한시적으로 운영했던 홈페이지가 구글의 검색엔진에 뚫리면서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KTF는 2002년 4월 가입자 3만여 명에게 바이러스에 감염된 e메일 고지서를 발송해 물의를 빚은 바 있습니다.


[MB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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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다. 개인정보를 유출한 KTF가 3개월동안 서류심사에 사실심사 등을 거쳐 개인정보보호 우수사이트 인증서를 취득했다니....그럼 도대체 이런 인증서조차 취득하지 못한 나머지 사이트들에는 불안에서 어떻게 가입해야 할런지.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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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면 어떤 책인지 알 것이다. 너무나도 유명하니까.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많은 소설 중에서 초반에 이렇게 흡인력이 강한 책은 드물었다. 흡인력이 강하다는 것은 현실과 어느 정도 부합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때 금서였던 이 책. 그러나 현실이 음울한 상황을 벗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이 이제는 현실과 동떨어진 '고전'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에 해금당한 것이 아니기에 안타까울 뿐이다.


오랫만에 다시 책장에서 꺼내면서 이곳에 옮겨본다. 이후는 '꼭' 사서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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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는 동으로 황해도에 인접해서 마식령 산맥의 산세에 닿고, 남은 예성강을 지경으로 경기도의 들판과 만나며 북은 대동강을 건너 평안도를 바라보는데 서쪽으로는 바다로  솟아나가 중국의 산동을 마주보고 있다. 들판도 있으나 험한 산에 골짜기도 깊고 ,오랫동안 경부에 가까워서 예부터 관의  혹정에 민감했으며, 도둑이 많아  조정을 괴롭히곤 하였다.  팔대 명산의 하나이며 태곳적 단군의 도읍지인 구월산은 그 줄기가 남서쪽으로 우회하여  추산을 따라 불타산에 이르고, 막바지로 그친 곳에 장산곶이라는 험한 해안 마루턱이 있으니 옛 노래에,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금일도 상봉에 님 만나보겠네
갈 길은 멀구요 행선은 더디니 늦바람 불라고 서낭님 조른다.


 

하던 곳이 그곳이다. 그곳에 지방민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어 기록하였으되, 기암 절벽이 바다 가운데까지 둘러서 있고 골짜기가 깊게 뚫렸는데 곶은 백여 리에 이르고 수세가 거꾸로 휘돌아서 근처의 임당수는 뱃길이  몹시 험하였다. 금색으로 반짝이는 명주실처럼 가는 모래가 수십리에 깔렸는데 밤새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해변의  사구가 나날이 이동하는 것이었다.
갯가에 게딱지같은 집들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었고 마을마다 아름드리 해송이 몇백  년씩 나이를 먹으며 자라고 있었다.   산세가 험하고 모래가 대부분인 해변에서 농사라야 수수나 기장 따위가 고작인 어촌 사람들은 진작부터 바다로 나가야만 했다. 열흘 길, 보름 길,  어떤 때엔 한달 이상씩 걸리는 긴 뱃길에서 풍어의 기쁨은 쉽게 잊혀지는 대신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풍랑에 삼켜져서 그 슬픔만이 오랫동안 남아 있곤 하였다.


마을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곳 바닷가에는 매가 날아와 살았으니,  나라의 응방에서 이 지방 매를 특산품으로 정하여 관가에 바치도록 하였는데, 특히  대청도의 이른바 해동청 보라매는 사람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어를 만드느라고 잡힌 고기를  얹은 마을의 지붕마다 잡새가  날아와 피해가 심했으나, 이 마을에 매가 드나들고부터는 얼씬하지 못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더욱더 매를  소중하게 알았다. 그들은 먹이를 주어 매를  돌보고 둥지도 지어주었으며, 고깃배가 출어하기  전날의 풍어제 때에는 매를 가장 귀한 제주로 알게 되었다.
 새벽에 주변의 섬으로 놀러 나갔던 매는 황혼녘이면 돌아왔다.  그리고는 마을 상공을 늠름하게 한바퀴 돌고 나서 당솔나무에 앉아 쉬거나, 마을의 지붕에 내려와 아이들의 찬탄 섞인 웃음소리를 들으며 사귀다 갔다. 고깃배가 출어하면 매는  한나절 거리는 좋이 됨직하게 따라왔다가 해변으로 돌아갔고, 그들이  만선의 북을 두드리며 포구로  돌아오면 벌써 매는 날씬한 날개를 펴고 포의 돛  위에 날아 앉거나, 마을 부녀자들에게  그들의 무사 귀환을 알리기 위해 재빠르게 날아가는 것이었다.


어느때 타국의 화선이 지나가다 물을 구하기 위해 포구 앞에 며칠 동안 정박하게 되었는데, 장삿배뿐만 아니라 간혹  다른 나라의 어선들이 연해에까지  침입해서 어장을 유린하곤 했으므로,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어서  떠나주기만을 무력하게 기다렸다. 뱃사람들은  식량을 원하고 교역하고자 했으나 원래 곡물이 귀한 마을 사람들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관리가 나와서 식량을 징발해 주고자 했는데 그때에 그는 매를 보았던 것이다. 관리는 그 매를 화주에게 주어 가물을 얻으리라 작정하게 되었다. 관리가  마을 사람들에게 매를 잡아오도록 명령하였다. 총명한 아이가 있어, 매를 그물에 씌워 다치지 않도록 한 다음에 당집에다 은밀히 숨겨두었다. 당집을 건드리면 동티가 날까 염려한 마을 사람들이 발분하겠으므로, 민원을 살까 두려워한 관리는 그대로 돌아갔다. 식량과 물을  내륙에서 간신히 조달한 타국의 상선도 떠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빼앗길 뻔한 매를 당집에서 꺼내어 날려주기 전에 의논을 하였다.


   이것은 우리 마을의 매요.
   아무렴, 우리 마을을 지키는 매지.
   하마터면 남에게 빼앗길 뻔했소.
   표를 해둡시다.


 마을 사람들은 매의 오른발에 붉은 색실로 매듭을 묶어준 다음 놓아주니, 매는 다시 자유롭게 떠올라 마을 상공을 한바퀴 휘돌아보고 나서 바다로 나갔다.   조기떼가 연평을 경유해서 대청 소청 앞 바다를 지나가는 철이 돌아왔다. 벌써부터 먼 곳에서 갈매기들이 모여들고 있는지, 새벽바람을 타고  먼바다에서 울부짖는 갈매기들의 음울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어망을 짜고 배를 수선하고 돛을 기웠는데 어계의 총대 되는 사람이 주도하여 별신굿을 벌일 준비를 서둘렀다. 당산나무  밑에 들맞이를 하고 나서 삼신제를 지낸 다음, 바닷가에 각종 제물을 펼쳐놓고 용왕제를 지내고서, 오색 융복에  전립을 쓴 무당이 밤굿을 벌였다. 몰려온 고기는 잡아야 하지만  일기를 헤아릴 수 없으니 살아 돌아오기도 딱히 기약하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이었다. 이튿날 새벽에 출어기를 올린 어선들이 바다로 나갔고, 매도 그들의 머리 위를 선회하면서 전송했다.


보름 뒤에 배가 만선이 되어 돌아왔으니, 온 마을이 들끊는 듯한 잔치가 벌어졌는데 그것은 험한 바다에서 되살아온 신생을 위해서였다. 한데 그제서야 마을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마을에서 매가 없어진 것을 뒤늦게 알아쳐렸다.
출어할 무렵인지 귀환할 때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매가 마을에서 사라져버려서 잔치 끝의 마을 사람들은 모두 슬프고 서운하여 사방으로 매를  찾아 나섰다. 아이들의 이야기로는 매가 바다로 날아간 지 사흘이 넘었다는 것이었다.  온종일을 찾아다니다 드디어 땅거미가 내려 덮였는데 한 사람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뭔지 보인다, 매 같다!


모두들 바람이 거세게 불어대는 저녁 바다를 향해 뛰어갔다.   아득한 수평선 위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바다와 하늘의 바깥쪽은 우중충하게 어두워지고, 수평선을 중심으로 가느다란 놀의 띠가 겹겹이 드러나 안쪽으로 향할수록 감빛이 짙어질 그런 무렵이었다.
어둠과 빛의 경계를 그 점들은 들락날락하였는데, 재빠르게 위로  아래로 도는 듯이 보였다. 파도와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박명 속에 가느다랗던 놀이 차차 사라져가고 어둠 속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두 점들은 가까워졌는데, 어느 아이가 외쳤다.


  둘이다. 싸우고 있다.
  하늘에서 싸운다.
  하나는 우리 매다!



매는 자기보다 몸집이 두어 배는 되어 보이는 날것과 맞붙었다가는 다시 떨어져 돌고, 또 맞붙어 날개를 치는 것이었다. 매는 수리를 피해서 뭍을 향해 물러서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하나가 위로 휙 날아오르면 더불어 올랐다가 바다를 향해 떨어지면서 서로 엇갈려 잠깐 멈칫해서 부리와 발톱으로 치고는,  치는 사이에 날개를 푸드득이는  소리가 바람소리 가운데 똑똑히 들렸다. 매는 수리 공격을 막아내면서, 될 수 있으면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의  머리 위로 가까이 날아오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매와 수리는 한 덩어리가 되어 끊임없이 날개를 치면서  뭍으로 다가왔다. 이제까지 보고만 서 있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도 결기가 가득차서 일시에 목청을  합쳐 고함을 질렀다. 매와 수리가 일단 흩어졌는데, 매는  아래로 낮게 날아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날개를 치면서 한바퀴 돌고 나서 다시 수리에게로 쫓아  올라갔다. 매가 날개를 퍼덕이며 지나갔을 때,  그 죽지에서 흩뿌려진 피가 잔치옷으로 갈아입은 마을 사람들의 흰옷 위에 점점이 번져갔다.   매가 수리를 향하여 일격을 가하려고 달려들 때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목청을 합쳐 고함을 질렀다. 허공에서 매와 수리의 깃털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수리는 매의 거세어진  기세에 당하지 못하고 목을 움츠리더니, 상대를 버리고 바다 쪽으로 달아났다. 매가 사람들의  고함 소리에 힘을 얻어 수리 뒤를 바짝  쫓아갔다.. 수리가 중심을 잃고 아래로 방향을  바꾸는데 매는 위로부터 곤두박질치면서 수리의 머리를 쪼았다. 치명타를 받은 수리가 물에 처박혔고, 매는 다시 위로 드높게 날아올랐다. 마을 사람들의 환성이 크게 일어났고, 매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자랑스럽게 맴돌더니 지친 듯이 마을 어귀의 당솔나무 가지 위에 내려앉았다.


마을 사람들은 먹이를 준비하고 풍악을 잡히면서, 매가 그들의  어깨 위에 다정하게 내려앉기를 재촉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매는 다른 때처럼  사람들의 팔뚝에도 내려와 앉지 않고 나뭇가지 위에서 날개만 몇 번 퍼덕여 보였을 뿐이었다.
주위가 완전히 캄캄해질 때까지 마을 사람들은 횃불을 밝혀 들고 매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횃불빛에 드러난 해송의 깊숙한 구멍 속에서 이번에는 구렁이가 기어 나왔다.  구렁이는 비늘을 번쩍이며 사리를 풀고는 나무를 타고 꿈틀꿈틀 기어올라갔다.
마을 사람들이 안타깝게 불렀건만, 어둠 속의 매는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구렁이가 나무 꼭대기를 향해 기어올라간 뒤에 한참 동안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더니 이윽고 폭우가 줄기차게 쏟아져 내려왔다. 천둥이 울고 번개가 번쩍였다. 빗소리와 우렛소리 속에서 밤새껏 퍼덕이는 날갯소리가 들려왔다.   동녘이 뿌옇게 밝을 즈음에, 지쳐서 나무둥치 아래 둘러앉은 사람들 앞에 토막 난 구렁이의 시체가 떨어져 내려왔다. 나뭇가지에 걸친 채로 날개와 부리를 땅으로 축 늘어뜨린 매의 형상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어째서 매가 나무에서 끝내 내려오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날렵한 아이를  시켜 나무 위에 오르도록 하였다. 올라간  아이가 죽은 매에 손을 대려다가 분한 듯이 외쳤다.


  실매듭이 나뭇가지에 걸렸어요.


남에게 빼앗길까 하여 매가 마을의 소유임을 표하느라고 매어놓은 오른쪽 발목의 붉은 실매듭이 매를 죽게 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매와 맺은  인연을 그저는 믿지 못하여 매듭으로 확인을 해놓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 인연 때문에 매는  밤새 싸웠고 기진하여 죽게 되었으니. 



일찍이 외병이 국토를 점령했을 적에 백성 중에 병을 일으킨 대장이 여럿 있어 그들과 오래 항전했었다. 한 의병장이 허수아비 같은 관군과도 대적해서  싸우다가 어느 싸움에 대패아여 병을 해산하고 민가에 숨어 있었다. 그가 장산곶 어부  집에 숨었다가 매의 죽음에 크게 깨우친 바가 있었다. 그는 밤새껏 잠들지 못해 뒤척이다가, 이 신뢰하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의 작은사랑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고 눈물을  흘렸다. 매가 기세를 펴지  못하고 매듭에 걸린 채 죽어버린 연유와 같게도, 그는 다른 대장들처럼 피살되었다. 그가 장산곶을 떠나 남몰래 귀향했는데 병이 해산된 뒤부터  노리던 자의 눈에 발각된 바  있었고, 포상금을 탐한 동료가 밀고를 했던 것이다. 수심과 괴로움으로  번뇌에 가득 찬 밤을 지새우고, 겨우  곤한 잠에 빠졌을 무렵 힘으로는 대적하지 못하리라 믿은 외병들이 무리지어 급습하여 부락에 불을 질렀다. 달아나지 않고 고감히  단신으로 뛰쳐나오는 의병장을 수십여  인이 장살하였다 한다.


 

어찌 백성의 가엾은 뜻을 위해 죽은 자가 그뿐이었겠는가, 흐르는 물과 같이 연면한 산맥같이 앞뒤로 끊임이 없건마는, 여럿과 맺은 관계가 마치 저  장산곶 매의 발목에 묶인 매듭과도 같았고, 그 장한 뜻의 꺽임은 뒤댈 바탕이 부족하매 분한 노릇이었다. 폭풍이 몰아치는 날 서낭나무는 둥치를 떨고, 내부에서는 구렁이가 꿈틀거리는데 가지에  걸린 매가 날지 못하여 깃을 퍼덕이는 안타까운 여러 밤이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 황석영의 '장길산'중에서 ---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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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용석 건국대 신방과 교수는 “철학은 없고 정치적 계산만 있다”며 최근 야당 의원들이 포털을 규제하기 위해 제출한 신문법 개정안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와 동시에 황 교수는 포털이 언론중재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 교수는 “포털의 영향력과 이용자 보호 측면에서 언론중재제도의 대상이 될 필요가 있다”며 “그러나 포털이 현재의 언론중재법에 포함되더라도 큰 법적 효과를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황 교수는 “인터넷상의 매개행위를 어떻게 중재할지, 현재의 언론중재법을 유지할지를 논의해야 한다”며 “중재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시급하나 신문법이 인터넷 신문의 규제·지원에 대한 포괄적 고민없이 포털을 규제하기 위해서 개정된다면 실패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음은 지난 26일 진행한 황 교수와의 인터뷰이다.


- 최근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과 민주당 이승희 의원이 포털을 겨냥한 신문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두 안 모두 뉴스 공급자인 신문사와 포털사업자간의 사적계약 관계에서 다뤄야할 문제를 국가가 법으로 규제하게 하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담고 있다. 국가가 특정 사이트의 뉴스 전달방식이나 편집방식을 규제하는 법은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다. 정치인들이 앞다퉈 이런 법안을 제출하는 것은 선정적인 입법 이슈를 선점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인터넷 관련 법안은 다른 어떤 매체 관련 법안보다 표현과 참여의 증진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이 법안들은 철학은 없고 정치적 계산만 앞선다. 헌법적 가치나 철학보다는 현상에 대한 땜질식 처방에 급급한 것이다. 졸속 입법이 우려된다.”


- 신문법과 언론중재법에서 포털과 관련해 보완되어야 할 점은.


“저작권이 없는 매개자는 정정행위를 할 수 없지만 포털의 매개행위가 갖는 영향력과 이용자 보호 측면에서 언론중재제도의 대상이 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머지 법안은 포털에는 필요하지 않다. 다만, 포털이 현재의 언론중재법에 포함되더라도 큰 법적 효과를 보기 힘들다. 인터넷상의 매개행위를 어떻게 중재할지, 현재의 언론중재법을 유지할지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중재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시급하나 신문법이 인터넷 신문의 규제·지원에 대한 포괄적 고민없이 포털을 규제하기 위해서 개정된다면 실패할 것이라 본다.”


- 포털이 언론인가, 플랫폼 사업자인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언론은 법적 개념이전에 사회적 개념이므로 법으로 언론과 비언론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무리다. 포털은 다양한 뉴스콘텐츠의 플랫폼만을 제공하는 것 같지만 실제 뉴스를 편집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언론행위를 수행한다. 그러나 자체 뉴스를 생산하지 않으므로 신문과 완전히 똑같이 취급하기도 어렵다.

매체의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에 사회적 책무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나 포털을 법으로 규제할지, 사회적으로 규제할지, 자율적 규제를 유도할지는 매체 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포털이 신문법과 언론중재법의 대상이 되느냐와 별개로 국가가 인터넷 매체의 편집행위를 직접 규제하는 것은 과도한 규제다.”


- 포털의 문제점이 개선되지 않아 논쟁이 끊이지 않는 것 같다.


“정보이용과 사회적 담론이 포털에 집중되기 때문에 포털의 사회적·정치적 책임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 책임을 다 하지 못할 경우 포털에 대한 제도적 규제가 뒤따른다는 것을 포털 스스로 알아야 한다. 이것은 포털사업자에게 높은 비용을 유발할 것이다.

포털은 영향력에 비해 이용자 보호 활동을 방기하고 있고, 또 뉴스의 연성화를 가져왔다. 뉴스 편집 분야의 전문성이 강화돼야 하고, 상업적인 것을 지양하는 내부 장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현재처럼 집중화를 유발하는 뉴스 서비스정책을 진지하게 재검토해야 한다.

자체 DB를 통해 배타적으로 뉴스 콘텐츠를 제공하는 방식은 초기의 인터넷 정신인 공유와 네트워크 개념과도 동떨어진 것이다. 네트워크의 기본 정신을 고민할 때이다. 책임있는 기업으로서 자율적인 대책을 빨리 내놓아야 한다.”


- 보수신문들은 연일 포털을 친정권 매체라고 비판한다.


“언론과 포털의 갈등관계 이면에는 사업자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 전통적 언론매체의 영향력 저하는 그 이유 중 하나다. 사회여론이 포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은 포털의 매체적 특성과 이용자들이 사회이슈에 대해 활발하게 참여하기 때문이다. 포털이 정권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주장은 정치권력이었던 전통적 언론의 시각에 가깝다. 오히려 포털 사업자는 정치적 문제보다 경제적 이익에 더 관심이 많다. 우려되는 지점은 인터넷의 상품화이다.”


- 포털이 정권에 의해 장악됐다는 주장과 상관없이, 대통령이 포털 관계자를 만나는 등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관심이 포털에 쏠리는 것도 사실이다.


“정치적인 공정성 시비는 일 수 있으나 포털은 정치지향적인 매체가 아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이야기되는 공정한 편집·보도를 위해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출처: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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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의 영화 <올드보이>에서 우리의 오대수는 말한다. "나는 이미 괴물이 되었다." 비단 오대수뿐인가. 이것은 최근 파괴적인 욕망과 충동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리거나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한국영화 주인공들의 공통된 자기선언이다. 그러고 보면 일찍이 "괴물은 되지 말자"고 반복해 다짐하던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 주인공의 호소는 이들에겐 전혀 먹혀들지 않았던 듯하다. 과연 그렇다. 최근 한국영화의 일각에는 괴물들이(혹은 괴물이 되어가는 자들이) 성업 중이다.


가령 <올드보이>를 포함한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은 모두 복수의 괴물이 출연하는 비극이고, 김지운의 <장화, 홍련>과 <달콤한 인생>은 저도 몰래 우연히 맞닥뜨린 불가항력적인 절망의 고통에 죄의식과 분노를 토해내며 괴물이 되어가는 자들의 이야기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과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의 인물들 또한 치유되지 않은 80년대의 상처를 짊어지고 편집증적 괴물이 되어간다. 그러니 이쯤에서 물어보자. 대체 이 난데없는 괴물들의 출현은 어찌된 일인가?


일단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모두 상업적 대중영화의 상상력과 문법을 빌려 작가의식을 실현했다는 데 있다. 최근 한국영화 속의 괴물은 그렇게 작가주의가 호러와 범죄물 같은 대중적 장르영화의 과잉의 상상력을 끌어들여 빚어낸 형상이다. 더욱이 그 괴물의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것이 스크린 가득 흘러넘치는 피와 폭력, 화면구도를 과격하게 일그러뜨리는 불안과 공포, 격렬한 심리적 갈등과 분노의 분출이라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당연하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일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그런 측면에서 상업적 코드에 붙들려 있는 것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 속에 은밀히 잠재한 정치적 환기력이다.


정치적이라니.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따져보면 분노와 죄의식이 뒤범벅된 운명론적 비극의 드라마와 그것을 장식하는 과도하고 현란한 스타일을 통해 이들 영화가 은연중 헤집으며 건드리는 것은 최근 한국사회 현실의 모순 속에서 배태된 대중적 (무)의식과 공통감각의 성감대다. 저 괴물의 이야기를 통해 나름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새로운 형태의 정치-윤리학 또한 저 자신의 방식으로 그에 대처하는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는 이른바 비판적 작가주의 영화의 정치성이 이제 <박하사탕>이 대표하는 이창동식 리얼리즘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영화의 정치적 함의는 역설적이게도 너무도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당연히 탈정치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극단적이고 파국적인 상황(예컨대 근친상간이나 우주인의 침공)에서 분출하는 폭력과 뒤틀린 정념 속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너무도 극단적이기에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그 사건의 파국을 몸소 떠안고 파멸로 치달아가는 괴물들의 일그러진 정념과 무력한 몸부림을, 이들 영화는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중요한 것은 저 사건들의 치명적인 파장과 갈등은 불가항력적이고, 해결할 수도 없으며, 화해는 더더구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니 당연히 감정은 격해지고, 파국은 숙명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것이 이와 반대로 역사와 현실의 계기들을 이야기에 끌어들이면서도 그 속의 위기와 갈등을 결국은 낭만적인 화해를 통해 봉합해버리는 <웰컴 투 동막골>이나 <태풍>류의 영화언어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 것인지도 여기서 함께 기억해두자. 여하튼 그럼으로써 이들 영화가 은유적으로 드러내놓는 것은, 지금 한국사회의 근원에 숨어 가로놓여 있지만 지배질서와 지배언어 속에서는 결코 포섭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적대적인 갈등과 결여, 절망적인 심리적 위기와 교착이다.


이 근저에 있는 것이 포스트-IMF시대의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심리적 불안과 위기라는 점은 필히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이를테면 희망과 가능성이 질식된 시대의 심리적 풍경이다. 한국사회의 일상과 씨스템을 재구조화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지배와 그로 인한 양극화의 고착과 심화는 가령 독재나 IMF위기의 시기에 그러했듯 그렇게 눈에 보이는 장애를 극복하면 무언가 나아지리라는 역설적인 희망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 듯하다. 독재는 사라졌고 경제위기는 극복했음에도 무언가 나아지기는커녕 삶의 조건은 한없이 악화되어가고 나날의 삶을 옥죄는 자본의 지배와 모순은 더욱 심화되어간다는 실감이 지금의 공통감각이다. 하물며 그것이 대중들이 막연히 민주주의세력 혹은 '진보'라고 생각했던 집단에 의해 가속화되고 있음에랴. 미래는 여기서 결코 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숙명론과 체념적인 인식은 그런 가운데 나오는 것이다.


한국 작가주의 영화의 비판적 정치의식이 그렇게 극단적인 과잉의 상상력을 통해 표출되는 것은 정확히 이런 현실에 조응한다. 불가항력적이고 해결할 수도 없는 절망적 상황에 휩쓸려 괴물이 되어가는 인물이 맞닥뜨리는 치명적인 위기와 곤경은, 해결될 가망이 보이기는커녕 근원에서 악화되어가는 한국사회의 실패와 결여, 적대의 지점을 헤집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극적인 우연과 불확실함이 지배하는 폐쇄된 세계, 그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악순환, 스스로 괴물이 되어 파멸로 치달아가는 인물들의 절망적인 심리, 치명적인 죄의식과 원한 등은 그런 실패와 적대 속의 주체의 불안과 위기를 응축하고 전시하는 영화적 증상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조금 다르긴 해도 최근 한국문학에서 부각되는 탈현실적인 허구 속에 스며 있는 신경증적 불안과 폐소공포, 절망적인 파국과 죽음의 이미지, 극단적인 환상의 문법 등을 그와 방불한 맥락에서 읽고픈 유혹을 느낀다. 물론 여기에는 똑같은 시각에서 볼 수만은 없는 장르와 세대의 차이, 정치의식의 편차 등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현재 한국문학에는 현실에 대한 민감한 감각에 뒷받침된 문학의 정치적·윤리적 책임의식과는 무관하게 자아에 고착된 자폐적인 실험에 안주하는 소설이 일부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그렇다면 예컨대 편혜영의 죽음과 악취의 미학이나 박민규의 장편 《핑퐁》이 보여주는 놀랍도록 음울한 종말의 환상은 어떤가?


이 물음에는 짐작하다시피 얼마간의 긍정과 부정이 섞여 있다. 하지만 친절한 대답과 해명은 이 짧은 글에서는 불가능하니 일단은 뒤로 미루고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우리가 이들 한국영화에서 적극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이런 물음이다. 결코 일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저 끔찍한 상황을, 결국은 나 자신일지도 모를 저 괴물-타자들을 대체 어찌할 것인가?


이런 물음이 일깨우는 것은 다름아닌 이를 제대로 사유하고 감당할 수 있는 정치와 윤리의 언어가 우리에겐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다. 물론 앞서 본 한국영화의 정치-윤리학은 아직은 모호하고 또 일면 타협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 영화가 그런 불안과 위기를 봉합하거나 섣불리 화해시키지 않는 한, 그것은 바로 그 속에서 새로운 정치와 윤리의 지점을 새로운 언어로 숙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한국문학에서도 그것은 아직 잠재적인 가능성일 뿐이다. 하지만 기왕에 탈현실의 허구를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작정한 문학이라면, 그 점은 한국문학이 한켠에서 열어가야 할 또다른 방식의 새로운 정치와 윤리의 언어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함께 기억하고 탐구해야 할 지점이다.
 

김영찬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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